믿는 대로 되는 인생5 (마9:18-26)
예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은 다릅니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실까에 관심을 가지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내가 어떤 믿음으로 예수님께 오느냐입니다.
오늘 두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한가지는 관리가 자기의 딸을 살려주기를 원하여 찾아온 사건이고
또 하나는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받는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의 약함이 있고 병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약함과 병과 아픔을 회복해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축복을 바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아무나 고쳐주시면 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을 베풀기 전에 반드시 물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어떻게 믿느냐입니다.
무엇을 할 사람으로 믿느냐입니다.
딸이 죽은 관원은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이 죽은 딸의 몸에 손을 얹으시면
죽은 딸이 살아나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9:18)
관리는 예수님께 나아올 때 몸에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믿고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두 말도 않고 따라갑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9:19)
우리는 예수님께 가면 답이 있다고 가면 믿음이 생길거라고 생각하고 간다.
그런데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 가기전에 믿음이 있었다.
그것이 무리와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다른점이다.
무리는 예수님께 가면 나의 믿음을 위해 나의 축복을 위해 뭔가 해줄것이라고 믿고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가기 전이 이미 마음에 확신을 갖고 예수님께 갔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열두해를 혈루병으로 고통한 여인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 와서 뭔가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오기전에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왔다.
겉옷만 만지면 고침을 받는 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그녀를 고쳤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녀를 고쳐주셨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9:22)
우리는 예수님께 가면 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간다.
그런데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오기 전에 믿음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온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누군지 확인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천국의 삶은 예수님이 아니라
내 <믿음>입니다.
내 믿음에 따라 예수님은 나를 대우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지만
그 예수님을 내가 어떤 예수님으로 믿느냐가 결국 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찾아올 때 믿는바 대로 그들을 대우하십니다.
몸에 손을 얹으면 죽은 사람이 낫겠다고 믿으면 직접 가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살리시고
옷에 손만 대도 낫겠다고 믿는 자에게는 겉옷만 만져도 낫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 안에서 믿음은 두 가지 종류입니다.
첫째, 와서 믿음을 구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오시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뭔가를 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는것 같지만 사실은 믿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을 봐야 믿는 자들입니다.
이상한 것은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기면 좋은데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기적자체입니다.
빵과 고기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런데 진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기적을 보지 않고도
예수님의 하실 일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말씀을 듣습니다.
진짜 믿음은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무리와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믿겠다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자리지 못합니다.
이미 기적을 본 사람들 마음에는 기적에 대한 갈증이 생깁니다.
기적의 부스러기를 갈망합니다.
은사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은사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
뭔가 더 큰 기적,
뭔가 찐한 은사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통해 믿음을 세워가기를 원하지만
말씀으로 믿음이 세워지지 않은 사람에게 은사는 믿음의 걸림돌이 됩니다.
예수님 자체로 믿음이 생기기 않은 사람이
은사로 믿음이 세워지는 것을 조심해야합니다.
자칫 신기루를 좇아 다니는 갈증병으로 믿음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죽은 관리의 집에는 두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피리부는 사람들과 슬피우는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죽은 딸을 둔 관리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믿음의 본체인 예수님이 와도 기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9:24)
믿음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을 구체적으로 기대한 관리는 이미
죽은 자기 딸의 몸에 예수님이 손을 얹으면 낫겠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자기 딸을 구원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잔다고 하니 그들이 비웃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의 영광은
세상이 비웃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비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광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 안된다고 포기한 곳에서 믿음은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이 말씀 한마디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이,
세상이 하나님 한분으로 천지가 창조 되었다는 것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모든 것이 갈립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미 구원이 있는 사람이고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구원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기적으로 찾아오지 않고
말씀을 통한 믿음으로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하신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들을 때 이미 그 마음에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본질은
기적입니다 .
돌이 변하여 떡이 되게하고
높은 성에서 뛰어내려 다치지 않는 당신의 특별함을 기대합니다.
한마디로 특별한 기적과 특별한 축복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보여야 믿으려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여줘서 믿는것이 아니라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심같이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이
새로운 세상의 눈을 뜨게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단 한번도 스스로 기적의 주인공이 되지 않게하셨습니다.
단 한번도 자신의 문제를 위해 기적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직 말씀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알면 우리 마음에 믿음이 찾아옵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했습니다.
그 말씀은 구체적이고 섬세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부분을 이루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들은 믿음의 말씀으로 예수님께 와야합니다.
둘째, 이미 가진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오늘 두 사람,
죽은 딸을 둔 관리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보고 이미 <믿고> 왔습니다.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에게, 세상에도 소망이 없다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소망이 없다고 아는 사람은,
세상에 답이 없고
세상에 누구도 나에게 소망이 안된다고 믿는 사람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 믿음으로 이미 믿고 나아오는 사람들이 기적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나에게 소망이 많으면 예수님이 소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이 그렇습니다.
소망이 없던 시절,
나라도 소망이 없고
집도 소망이 없던 시절에는 오직 예수님께 가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든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지식이 생기고,
나에게 재주가 생기고
나에게 뭔가 믿을 근거가 생기면서
목사까지도 하나님이 아니어도 믿을 구석이 생겼습니다.
선교사까지도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될 넉넉함이 생겼습니다.
믿을 친구가 있고,
믿을 자리가 있고
믿을 실력이 생기니
예수님께 전부를 걸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절대적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먼저 주십니다
오기 전에 이미 말씀을 들으면서 소문을 들으면서
예수님이면 내 인생을 회복한다는 믿음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그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예수님의 힘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힘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알게되자
자기에게 소망을 두고
예수님,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힘이 죄가 됩니다.
그곳에는 능력이 악이 됩니다.
그곳에는 권위가 갈등이 됩니다.
그곳에는 돈이 미움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 믿을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피리부는 자와 관리의 친구들은 예수님의 잔다는 소리가 비웃음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죽은 딸을 가진 관리는 그 소리가 소망의 소리가 됩니다.
희망의 소리가 됩니다.
기쁨의 소리가 됩니다.
이미 믿음으로 나아온 자에게는 세상의 비웃음이 기쁨의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서 옵니까?
왜 믿음이 오지 않습니까?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내가 별일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 되려면 어둠가운데 있어야 빛을 보는데
아직 내가 가진 많은 것 때문에 내가 어둠에 있는지 빛에 있는지 구분을 못해서입니다.
가지지 못한 것이 믿음을 가지는 절대적 근원입니다.
가지지 못한 것,
없는 것,
아픈 것,
눈물 흘리는 모든 것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천지를 창조한 그 말씀을 들으면 <비웃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을 창조한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캄캄한 어둠에 거하여
빛이 와도 알지 못하는 무지 가운데 거합니다.
그 무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전히 믿는 내가 가진 어떤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환경을 보고 나를 보고 경험을 본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포기 하지 않으면 예수를 따르지 못합니다.
내가 진짜 믿음이 있으면,
내가 진짜 예수님이 소망이라고 믿으면
가진 것을 귀하게 사용할 줄도,
가진 것을 버릴 줄도 알아야합니다.
제자들의 공통점은
배와 아버지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돈 버는 자리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사람은 기적이 아니어도
이미 마음에 예수를 유일한 소망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아닙니다.
믿음의 본체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분께 가야 내 인생의 새로운 창조,
천지 창조의 역사가 내 인생의 새롭게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
그 사람만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비웃을 때
나에게 눈물이 있다면,
세상이 조롱할 때
내 가진 것을 버리고 묵묵히 그분 옆에 있는다면
세상이 등을 돌리고 돌을 던질 때
그분이 하실 일을 기대하고 돌을 맞고 욕을 먹는 사람!
그 사람에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태초의 천지는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말씀이 찾아오면 내 안에 믿음이 일을합니다.
세상은 기적으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
말씀으로 이루어진 세상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일 하면 내 인생은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세상은 말씀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눈물 나는 것은
믿는 자들도 말씀이 일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 말씀이 오면
내 안에 믿음이 일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이 들리면 내 마음에 믿어지는 것을 잡으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을 일하게합니다.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들릴 때 믿어지는 것!
그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의 선물입니다.
* 둘째 다빈이 입니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 다녀오느라 6개월이 늦었습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다닙니다.
즐거워합니다.
친구를 사귀었다고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는 부모는 그냥 행복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봅니다.
그냥 행복해 하고
그냥 삶을 기쁨으로 살면 그것이 주님의 기쁨입니다.
주님 한 분!
그분께 가면 우리의 모든 행복이 있다고 믿고
가지나 가지지 않으나
능력이 있으나 없으나
천국이 보장된,
천국이 본전인 우리의 삶이
날마다 행복이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일등만 만드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 때문에 전부를 열등아로 만드는 나라와 교회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행복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 비웃는 자들 뿐입니다.
집어 없어서도
가족이 없어서도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믿음이 없으니 모두 가져도 불행입니다.
참 행복의 가치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일상임을 알지 못하는
기적,
능력,
일등에 갈증으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떠오르는 태양으로
부는 바람으로
함께한 사람으로 행복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즐거운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비록 채워지지 않는 가슴으로 살아도
한 분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이기에…
그렇게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