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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대로 되는 인생4(마9:18-22)
하나님의 <능력>은 내가 정한 믿음의 <방법>을 따라 역사한다.
예수님은 믿음으로만 역사한다.
다른 율법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믿음안에서 사는 것을 말씀하시고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산상수훈 후에
8,9장에 걸쳐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고쳐주시는데 이상하고 특별한 것이 보인다.
그것은 고치는 방법이 다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와서 <원하시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왔고,
그래서 원하는 대로 고침을 받았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8:2)
어떤 사람은 <말씀만> 하라고 해서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말씀으로만 해서 나았고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8:8)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그냥> 낫게 하셨고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8:14-15)
어떤 때는 죽게 되었사오니 구원하여 달라고 하자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하셨고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8:25)
어떤 사람에게는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약한 사람을 데리고 오자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병이 고침 받게 되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그리고 오늘은 혈류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병이 나을 줄 믿었더니
예수님께서 그 믿음대로 고쳐주셨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9:21-22)
무슨 말인가?
모든 것은 다 내가 기대하는 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는대로 되는 것이다.
<믿음>의 다른 말은 <기대>이다.
내가 이루어지는 기대대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어떤 사람은 직접 오셔서 <만져야> 구원을 얻겠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찾아가 몸을 만지고
고쳐주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9:18)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9:25)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씀만 하시면 낫겠다고 믿은 백부장의 하인과 귀신들린 자들은 그렇게 되었다.
믿음은 뜬구름 잡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믿음은 구체적이고 어떤 방법이든지 내가 믿는바 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이고 축복이다.
첫째, 믿음은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믿음의 구체성>으로 일 하신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친 것은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은 결국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 믿음은 두루뭉실한 개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소원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믿음이 좋으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막연하게 기다린다.
그것도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마태복음 8장과 9장은 철저히 구체적인 믿음을 보여준다.
몸에 손을 대어서 낫을줄 믿으면 몸에 손을 대어서 낫게하시고
말씀만 하시면 낫게 될줄 믿으면 말씀으로 낫게하시고
겉옷을 만지면 낫게 될줄 믿으면 겉옷을 만지만 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구체성>이다.
자 이 믿음의 구체성은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 적용이 된다.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할 때
하나님은 늘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셨다.
모세다.
모세가 하나님을 떨기나무에서 만날 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막연하게 보여주지 않으셨다.
손이 나병이 들게도 고치게도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손을 옷 안에 넣으라 빼라 하셨다.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을 땅에 솟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팡이도 던지라 그리고 잡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꼬리를 잡으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4:4]
뿐만 아니다.
홍해 앞에선 모세에게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것을 믿었지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팡이를 든 손을 내 밀어라 하셨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출14:16]
그 외에도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의 구체성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믿음이 있는가?
믿음은 내가 기대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은 일하신다.
하나님은 뜬구름 잡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막연하게 알아서 잘 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오늘 구체적으로 손을 한번 내 미는 것도
손을 옷 안에 넣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
머리털 하나도 다 세신바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을 말한다.
하나님은 섬세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보여주시고 싶은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둘째, 믿음은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결단하고 나아가야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드러나길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정확하게 옷을 대면,
정확하게 말씀하시면,
정확하게 몸에 손을 대시면이라는
정확한 주님의 표현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체성이 없다.
늘 막연하게 주님께 나아간다.
아니다.
믿음은 구체성이다.
막연한 믿음은 막연한 하나님을 만들고
믿음의 구체성은 섬세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너무 막연한 신앙생활을 한다.
우리는 너무 막연한 기도를 한다.
그것도 믿음이다.
맞다.
그 믿음대로 하나님은 역사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믿음으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 나아오기를 기대한다.
단,
어떤 믿음이든지 하나님은 그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것이 맞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구체성으로 나아오기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결단하고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옷을 대든지,
말씀대로 하든지,
몸에 손을 대든지
아니면 원하시는 대로 되어지기를 원한다는 행동의 구체성을 기록하고 있다.
셋째, 믿음은 구체적인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행동을 원하신다.
믿음은 믿는대로 되어진다.
내가 옷을 대면 낫는다 믿으면 옷을 대어야 낫게하시고
내가 말씀대로 되어진다고 믿으면 말씀하신다.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되어진다고 믿으면 원하시는대로 되어진다.
구체적인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삶이
막연한 삶이 아니라 구체적인 죄의 결단과
믿음의 발걸음을 원하신다.
기억해야한다.
주님은 어떤 역사를 보여주실 때 손을 옷안에 넣고 안넣고를 원하셨다.
주님은 지팡이의 꼬리를 잡으라고까지 기적을 보여주실 때 말씀하시는 섬세한 하나님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막연하게 주님께 나아가고
막연하게 기도하고
막연하게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도 듣고,
기도도하고,
큐티도한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결론은
"그래 하나님을 잘 믿어야지"
"그래 기도 열심해 해야지"
"그래 선교 잘 해야지"
"그래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결심하고 산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손을 내 밀어라
지팡이의 꼬리를 잡으라고 섬세하게 행동할 것을 지시하시는 섬세한 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막연하게 적용하고 막연하게 산다.
그래서 내 삶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주님은 세금 문제가 나왔을 때 제자들에게 어디를 가서 물고기를 잡아서
그 물고기 뱃속에 동전을 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타고 갈 나귀를 준비할 때 어디를 가서 나귀를 가져오고
그러면 누가 무슨 말을 할 것이고
그러면 너는 무슨 말을 하라고까지 구체적으로 일러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늘 막연하다.
늘 구체적인 믿음의 적용과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늘 막연하고 뜬구름속에 걷고
내 삶의 구체적인 변화와 구체적인 은혜는 놓치고 사는 것이다.
주님께 나아가길 원하는가?
그럼 어떻게 나아갈지 정해야한다.
주님이 오늘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아가고
무엇을 간구하고
어떤 삶의 변화를 기대하는지 그것을 가지고 나아가야한다.
예를 들어,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하거나 큐티를 할 때
주님 앞에 구체적으로 그럼 어떻게 주님께 나의 믿음의 삶을 보여줄지 적용점을 찾아야한다.
어떤 사람이 헌금에 대해서 말씀이 오면
"그래 열심히 헌금해야겠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거야"라는 적용은 가짜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럼 매주 얼마를 하고 매달 얼마를 하고
누구를 위해 얼마를 헌금하고 누구를 위해 얼마를 구제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해~"
라고 말씀하신 다는 것이다.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자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정해진 규례대로 감사를 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8:4)
이 명한 말씀은 레위기 14:2-13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고운 가루부터 산대 두마리 또는 어린 암양 하나까지 구체적이시다.
그것을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치료후에 명령하셨다.
구체적인 믿음의 삶을 의미한다.
신앙은 물 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가나 혼인 잔치에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아구까지 꽉 채우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믿음의 구체성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간섭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가 믿음의 삶의 재미를 모르는가?
왜 우리가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믿음의 구체성이 내 삶에 없어서이다.
믿음은 막연하고 하늘의 구름잡는 일이 아니다.
믿음은 구체적이고
믿음은 내가 알 수 있도록 찾아오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주님께 믿음의 구체성을 가지고 적용해야한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가 밝히 알고 깨닫도록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신다.
믿는대로 되는 인생 네번째는 <믿음의 구체성>이다.
구체적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늘 구체적인 결단을 원하신다.
죄를 버리겠다고 하면 어떤 죄를 버리고
어떤 악을 버리는지 결단하기 원하고
선을 행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선을 행할지 결정하고 나아기를 원하신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찾아오자
주님을 믿는 증거로 자신의 재물을 내 놓았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19:8]
그는 주님이 찾아오자
내 소유의 <절반>,
토색한 것의 <사 배>라는
믿음의 구체성을 보여준다.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가?
믿음의 길을 원하는가?
믿음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 드리는 삶의 구체성이고
그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믿음의 구체성에 대한 화답이요
믿음의 구체성에 대한 실제적 축복이다.
이 믿음의 걸음을 알지 못하면 평생 이방인처럼
중언부언기도하고
이 믿음의 길을 알지 못하면
평생 변하지 않는 내 삶의 인격과 죄로 살 수 밖에 없다.
네가 믿느냐?
그러면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구체적인 음성을 들어야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내가 믿는 구체성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통로이다.
주님은 내 믿는바 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결론은
내가 원하는대로 남도 그렇게 대접하라고 하셨다.
그 전제가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남에게도 하라고 결론으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는대로 우리에게 먼저 대우하신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믿는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믿으면
너도 이와 같이 남에게 하라는 구체적인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도 나도 영적으로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은 같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 사는 믿음의 삶이다.
* 기도는 막연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이고 삶의 현장에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아뢰는 것이고
하나님은 구 구체적인 기도의 현장에 구체적인 응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 믿음의 구체성입니다.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기도는 구체적이고 그래서 구체적인 내 삶의 결단을 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