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걸림돌 3 (마9:9-13)
이상합니다.
같은 죄인인데 중풍병자에게는 '네 죄를 사했다'고 하시고
같은 죄인인데 마태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합니다.
같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같이 노는 사람이 달랐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놀지를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이 더 인생에 도움이 될것 같은 사람입니다.
일을 할 때 뒷일을 봐주고, 지원도 많이하고 인맥도 넓혀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인생 종착역에 모인 인간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 먹고 놀았습니다.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의인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냄새나고 따돌림 당하고 하나님께 버림 받은것 같은 그런 인간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어제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자된 자를 그저 고쳐주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관에서 멀쩡히 일하는 세리 마태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9:9)
예수님이 상대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들은 기분이 나쁩니다.
자기들과 놀면 인생이 좀 펴지고 인생 사는 것이 좀 쉬울텐데 예수님이 굳이 인생 말종들만 상대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관계의 원칙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필요한 인생입니다.
그것은 객관적 필요가 아니라 주관적 필요를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다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객관적 사실입니다. 인식을 하든 하지 못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상대하고 찾아가고 부르시는 사람은 그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 인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의인과 죄인이라는 표현으로 설명을합니다.
예수님의 관계의 기초는 바로 자기 인식입니다.
정확한 자기 인식, 즉 자신의 허물과 약함과 병과 더러움과 죄인됨을 철저히 인식하는 정도만큼
예수님은 깊이 관여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해주는 경우가 있고
죄인을 불러서 나를 따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왜 마태는 부르시고
중풍병자는 죄를 사하고 고쳐만 주실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이 죄인된 <자기 인식>입니다.
더 많이 죄인 되었다는 처절한 눈물속에 더 깊은 따름이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갑니까?
죄인됨의 자기 인식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 종착역에 모인 사람들,
인간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이들의 자기 인식은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인식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부르시는 조건이고 이유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은 자기에게 그래도 소망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살아야할 이유가 있고,
나에게 뭔가 하나님께 가지고 갈 의로움이 있다는 의인의식입니다.
그러나 마태에게는 그런 의인 의식이 절대없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기들에게는 결코 가질수 없는 마음이 바로 이 <의인의식>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바로 죄인의식, 자기 인식입니다.
그것은 객관적 인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너는 죄인이라는 객관적 인식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처절한 눈물과 아픔과 애통으로 목놓아 통곡하는 인생의 눈물입니다.
그 눈물이 바로 자기인식의 증거입니다.
그런 자기인식이 예수님이 부르시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놀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잘 노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놀음은 회복의 놀음이고 예수님의 식사는 소망의 식사입니다.
'나 같은 죄인'입니다.
오직 이 마음만이 예수님이 나를 부르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되고 근거가됩니다.
그 어떤것도 예수님을 일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왜 우리와 놀지 않고 죄인들과 세리들과만 노느냐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의식이 아니라 죄인의식이다.
제사가 아니라 상한 마음이다.
손에 들린 헌금이 아니라 가슴에 담은 눈물이다.
나에게 있는 희망이 아니라 나에게는 이유가 없다는 절망의 눈물이다.
나도 예배의 앞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당당함이 아니라
예배의 뒷자리도 감사하다는 흘러 넘치는 감사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믿음의 걸림돌 세번째는 <죄인의식>의 부재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오게하고 예수님이 부르시는 가장 강력한 조건은 바로 이
죄인의식입니다.
더 많이 죄인의식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이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부름을 받습니다.
어쩔수 없이 세관에 앉았으나 처절한 인생의 눈물과 버림 받았다는 인생의 종착역에사는
그의 마음을 예수님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세리로 가진것이 내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철저한 가지 인식이
예수님의 부름을 듣게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한 사람의 가장 큰 시작점에서의 공통점은
<처절한> 죄인의식입니다.
모세는 살인자로 사람들이 무서웠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두려운 우상을 섬기는 집안이고
요셉은 자기만 알던 사람이고
베드로는 예수님까지 버린 배반자고
사도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고 믿는 자를 감옥에 넣은 믿음의 전과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한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가장 처절한 죄인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예수님이 항상 머물게하고 교제하는 근거입니다.
이 의식이 살아지면 우리 안에 예수님은 머물 수 없습니다.
이 의식이 사라지면 찾아오는 마음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는 일들이 마음에 안듭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9:11)
주관적 자기의식, 즉 죄인 의식이 사라지면 찾아오는 것은
예수님의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고 반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는 방향은 늘 형제이고 죄인의식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소망이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 조차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근거가 있고 하늘을 당당하게 쳐다보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 말은,
목사가 마음에 안들고,
교회가 마음에 안들고,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인생을 이렇게 대우하시는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나에게 이런 환경에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신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 의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냥 환경보다 예수님이 지금 나와 먹고 놀고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만으로 그냥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가 깊고,
그 죄의 자기 인식으로 죄인 의식으로 깊은 아픔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네 죄가 사했다는 말 한마디
나를 따르라는 말 한마디가 천국입니다.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죄인 의식이 없으니
주님이 부르시는 나를 따르라는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는 병을 고침 받았지만 침상을 들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주를 따랐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리 마태는 부의 부르심을 입습니다.
이유는 철저한 죄인인식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이유는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가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기 인식에 근거한 고백입니다.
[눅5: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진짜 죄인의식을 가진자는 주님 같은 분이 나에게 오는 것은 죽음임을 알기에
나를 떠나라는 철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터널속에 나를 부르시는 희망의 빛을 들을 때
그들은 다 버리고 주를 따를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주님이 부르시는 것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우리가 첫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은
이 첫 주관적 죄에 대한 자기 인식을 잃어버려서입니다.
믿음의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죄>에 대한 <주관적 자기 인식>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이 마음,
죄인됨을 깨닫는 자에게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이 마음이 떠나면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주님의 음성,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오직 처절한 죄인 의식을 가진 자에게만 들리는
천국의 문을 여는 소리입니다.
* 교회는 수 많은 죄인들로 세워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회는 의인들로 가득찼습니다.
다 자기가 잘났다고 합니다.
다 자기 말이 맞다고 합니다.
누구 하나 나보다 남이 낫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신 주님의 은혜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함께 여기는 자기인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교회가 주님이 찾으시는 교회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들…
제가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가 그런 교회여서 저는 참 좋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자라게하시고 섬기게하시고
함께 있게하시는 하나님!
영광스런 삶입니다.
성경캠프 시간에 만든 창작작품입니다.
초로 교회를 만들고 죄인들을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죄인들이 모인 곳이지만
죄인 의식이 가득한 곳이면 교회는 가장 거룩한 곳,
예수님이 주인되신 교회가 됩니다.
의인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죄인의식이 많은 사람들로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