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걸림돌 2 (마9:1-8)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구체적인 삶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래서 8장부터는 믿음으로만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으로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고, 백부장의 하인이 예수님의 말씀으로만 낫게되고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본체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도대체 예수님의 무엇을 믿어야하는지 계속 보여주십니다.
첫째, 나의 믿음으로 다른 사람도 달릴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2)
믿음은 나를 살리는 믿음이 있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입니다.
중풍병자를 다른 형제들이 침상체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치칩니다.
나의 믿음은 나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위해 믿는 믿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리는 믿음까지 가야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이 분량을 요구했습니다.
베드로가 사단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싸움을 할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눅22: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 기도의 내용은 첫째가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방향은 형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형제>입니다.
형제를 향하지 않는 믿음은 겨우 나만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의 방향성은 바로 형제입니다.
오늘 그 믿음이 형제를 통해 일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형제를 살리는 자리까지 갑니다.
믿음은 나만 살리지 않고 형제를 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그 믿음은 나만 아니라 내가 믿는 모든 것을 살립니다.
설령 중풍병자라도 내가 예수님께 데려가면 그도 살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둘째, 형제를 향한 믿음은 그의 가장 약한 것을 도와줄 때 역사합니다.
약함이 믿음의 디딤돌이 됩니다.
중병병자의 병이 그들에게 믿음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 나아가는 방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도울 때 그들의 가장 약함이 회복 될줄 믿고 가야합니다.
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내가 믿어주는 믿음의 구체적인 현장,
즉 그들의 약함과 예수님과 직면하게 해 줌으로 그들의 약함이 회복의 기회가 됩니다.
성경에는 약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회복되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생명을 얻은 사람은 다 약하고 힘없고 연약한 시간일 때 주를 만났습니다.
나에게 소망이 없어야 예수님이 보입니다.
나에게 소망이 없다고 고백하고 믿음의 대상을 찾을 때 주님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약함이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게 해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는 넉넉한 사람들이 대접 받는 일순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인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교회에 말이 많아지고 교회 안에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약함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소망없음과 약함을 지나지 않은 교양과 종교로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하고 교회의 본질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약함으로 주를 만나야합니다.
좋을 때 더더욱 좋아지기 위해 예수가 필요한 곳에는
교회의 본질이 없습니다.
약할 때 주를 만나는 기회를 주어야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회의 본질적 모습을 지키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믿어야합니다.
사람들은 병과 귀신만 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과 약함것만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병을 고치지 않고 죄를 사한다고 하셨습니다.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죄와 병을 연결해서 고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9:6)
병을 고쳐도 죄를 고치지 못한 곳에는 참 자유함이 없습니다.
병은 제한적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참 자유함과 참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어야합니다.
이 죄를 해결해 주시는 분을 믿어야합니다.
이 죄가 해결된 사람만이 참 자유를 누리고 영생을 회복할게 됩니다.
죄를 용서하실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성경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병만 아니라 병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시는 예수님!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9:8)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8장부터 보여주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
병과 약한 것을 짊어 지시는 분,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분,
귀신을 쫓아 내시고 장하게 하시는 분!
그리고 오늘 내 믿음으로 다른 사람도 고치시고
우리의 죄도 사하실 수 있는 분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셔서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설명합니다.
모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만 그 예수님의 무엇을 믿어야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믿어지고 경험되어질 때
우리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니 경험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니 살지 못합니다.
그저 나의 지식과 생각의 세상 안에 갇힌 신앙으로
겨우 자기의 먹을 것만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믿어야합니까?
병과 죄를 고치며 나의 문제만 아니라 형제의 문제를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들도 고치시는 분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힘들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나의
<기준>을 넘느냐 넘지 않느냐만 중요합니다.
그들이 정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아무도 죄를 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가 정한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고
믿음을 대하고 예수님 조차도 대합니다.
다 자기 <기준>입니다.
이 기준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기준이라고 세상에 답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기준으로 늘 하나님의 일을 제단합니다.
칼질합니다.
저울질합니다.
이 몇번의 <~질(doing)>이면 하나님의 아들도 죽입니다.
그곳에는 구원도 없고
믿음의 역사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자기 기준의 질(doinfg)로 죽어가는 사람의 아픔도 모르고 고통도 눈물도 모르고
오직 자기의 기준만 남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기준이 되는 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목박힙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이 자기 기준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우리 주변의 수 많은 중풍병자들의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나의 <기준>이 말입니다.
믿음의 걸림돌 두번째는 <자기 기준>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체는 성령입니다.
이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것이 영원한 영생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열매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답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람이 따 먹은 선악과가 아니라 성령이 맺는 열매를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성령도 나의 기준으로 저울질하고
교회도 나의 기준으로 제단질하고
다른 사람도 나의 기준으로 칼질 합니다.
그 기준을 버려야합니다.
오직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성령의 열매는 맺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이 저울질, 칼질, 제단질은 성령께 맡겨야합니다.
그 세가지 질(doing)의 고향인 기준을 성령께 의뢰해야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한발자국을 최선을 다해 걷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무엇을 믿어야합니까?
예수님이 가시고 보내신 내 안의 성령이 나의 기준이고,
나의 전부를 인도하시고
나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거룩하게
풍성한 열매 맺게 하심을 믿어야합니다.
이 성령에 대한 인식과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늘 나의 기준으로 몇번의 ~질(doing)로 사람도 죽이고
교회도 죽이고
나도 죽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기준이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기준이 되야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발걸음을 옮기고
주신 마음에 전부를 드리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열심의 단어는 하나님의 단어이지 나의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의 단어는 오직 순종입니다.
열심은 자칫 성령을 앞서 갈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러나 기준이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면
성령의 열매를 그분이 맺어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나의 기준의 열매가 아니라
나의 순종을 통한 성령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걸림돌인 <나의 기준>이 내려놓아야합니다.
아프지 않고 그 기준이 내려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 남서울 은혜교회 청년회가 오기스 교회 성경캠프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캠프를 통해 현장의 교회에 도움을 주기도하지만
자신의 기준을 내려놓는 훈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번의 선교여행이 우리의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날마다 나의 기준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기준을 삼고 주신 한 마음에 목숨을 거는
날마다의 시간이 나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하나님 나라를 세웁니다.
그 진리를 사랑하는 청년들이 알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