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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기적

평범한 기적

 

 

 

 

 

 

 

 

평범한 기적(마6:19-34)

 

사람이 크게 보이면 사람을 따라가고 하나님이 크게 보이면 하나님을 따라갑니다.

물질이 크게 보이면 물질을 따라가고 이 땅이 크게 보이면 이 땅을 따라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크게 보이는 사람, 하늘이 크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6:1)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보이기에 좋은 것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보이기 좋은 구제이고, 기도이고, 금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말씀하시면서 하시는

보물을 쌓는 이유는 뭔가?

이 땅이 크게 보여서 그렇습니다.

이 땅이 하늘보다 더 크게 보이고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사람은 보물을 이 땅에 쌓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19)

 

그래서 보물을 땅에 쌓는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22)

 

보물을 땅에 쌓는 이유는 보는 눈이 어두워서 진짜 큰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몸이 성하지 않은것처럼

눈이 밝으면 몸뿐 아니라 영혼도 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느 것이 더 큰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어는 것이 더 가치 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땅이 큰지 하늘이 큰지,

사람이 큰지 하나님이 큰지

보물이 큰지 하나님이 큰지!

 

보물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물을 주인으로 여기고 살고,

하나님이 크다고 볼 줄 알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

 

크게 여겨지는 것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보물이 큰지 하나님이 큰지에 대해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내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를 먹는 것보다, 입는 것보다, 마시는 것보다 작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세상보다 작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믿음은 나를 보는 시각의 변화입니다.

눈의 변화입니다.

 

어느 것이 크냐를 분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은 합리와 이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는 합리와 이성입니다.

합리와 이성으로 보면 사람이 땅에 전부를 걸고 살아야하고

사람에게 보이며 나를 크게 보여야하고

먹고 사는 것에 전부를 걸고 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의 길, 합리와 이성적 접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봐도 세상을 봐도 믿음의 눈으로 보라고 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하나님은 믿음의 눈으로 볼 때만이 진짜 크기를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크게 보이는 것을 따라갑니다.

크게 보이는 것이 주인이 됩니다.

 

둘째, 우리는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으로 나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먹으면 내가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내가 좋은 것을 입으면 내가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고

내가 좋은 것을 마시면 내가 마시는 것의 수준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은 집에 살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내가 좋은 차를 타면 내 수준이 차의 수준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길은 환경으로 나를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나의 환경이 좋고, 내 보물이 좋으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환경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결정이 되는 존재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참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다 주어진 것입니다.

 

셋째,  <주어진 것>과 <해야 할 것>을 오해합니다.

 

세상은 주어진 것을 위해 살아야한다고 그것만 보게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미 주어진 것을 보지 못하게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을 위해 살지 살아야 할 것을 위해 살지 못하게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어진 것이 보이는데 세상의 합리와 이성적 눈으로 보면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쟁사회에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죽어라고 사는 이유는 주어진 것뿐입니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믿으나 믿는 것이 아니고 사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고 고백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요단강을 지나고 홍해를 지나는 것입니다.

이미 애굽의 방식, 세상의 방식에 대하여 죽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죽었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이 세례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는대도 여전히 내가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 때문에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세상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꾸 나를 더 믿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 위해서 <살고 살아야 > 위해 살지 않아서

정말 주어진 것을 얻는 <평범한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넷째, 세상은 기적이지만 우리는 평범한 기적입니다.

 

그것이 이미 주어진 것을 얻는 기적입니다.

하늘의 만나를 얻는 것은,

광야에서 만나를 줍는 것은 따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따고 어렵게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줍는 것입니다.

세상은 기적이고, 세상은 럭키인데 우리는 평범한 일상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기적이 되는 삶으로 사는 것이 믿음 없는 삶입니다.

 

왜 평범한 일상을 기적처럼 사십니까?

기적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기적인데

우리는 이미 광야의 만나가 날마다 떨어지는 것이 보장된 삶입니다.

그 보장된 삶을 버리고 내가 고민하고 수고하고 땀 흘려서 살려고 하니

예수님이 참 답답해 하십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하셨겠습니까?

 

솔로몬의 영광이 들풀 하나에도 못 미칩니다.

그 들풀이 지천으로 널린 것이 세상입니다.

지천에 널린 평범이 우리의 일상으로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을 위해 목숨 걸고 살고 주어진 것을 겨우 얻으면

겨우 먹고 사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만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놀라운 기적, 하나님의 은혜라고합니다. ㅎㅎ

아닙니다.

<평범한 기적>이

<놀라운 기적>이 되는 것이 <더 기적>입니다.

우스운 기적입니다.

우리의 기초는 평범한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것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평범한 기적을 위해 보물을 땅에 쌓고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을 위해 살고

그것이 얻어지면 자기 공로화해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려고 하며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말하는 놀라운 기적이 상식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이 들풀 하나에도 못 미치는데 그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의 삶을 사게 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을 위해 살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이미 주어진 것이 주어진 것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살아야 할 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것>과 <주어진 것>을 오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세상은 자꾸 오해하게합니다.

오해할 뿐 아니라 착각하게 하고 그것을 위해 목숨 걸게합니다.

 

다섯째, 이방인은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기도하지만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것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주어진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주어진 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주어진 것이 주어진 것이 되려면 하나님 아버지를 믿어야합니다.

그것이 주어진 것이 주어진 것이 되는 조건입니다.

 

믿음은 내가 가진 전부를 살아야 할 것에 거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것에 걸어야 할 내 것을 주어진 것에 위해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에게 가장 축복은 가나안이 아닙니다.

죽음의 고백을 지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적의 삶은 가나안의 젖과 꿀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세상보다 크게 보일 때 우리는 주어진 것을 위해 살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만 이방인처럼 살아갑니다.

가장 기초도 되지 못합니다.

이방인은 아버지가 없어서 자기가 먹고 입는 것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고 있습니다.

 

살아야 것을 위해

주어진 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됩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가나안도 잃고 젖과 꿀도 잃게 됩니다.

 

<평범한 기적>이 일상이 될 때까지 우리는 <살아야 할 것>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그것만이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유일한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 남천교회 청년회에 윤예지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쁜 마음을 담아 보냈습니다.

갓 직장생활을 하는 시절에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선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몫을 선듯 내놓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살아야 할 것과 주어진 것을 구분하면 산 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더더욱 직장이라는 주어진 것을 위해 살아가는 곳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주어진 것을 위해 살아가는 곳에서 살아야 할 것을 위해 살아가는 청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귀하고 이쁜 예지의 주어진 것은 평범한 기적이 되는 살아야할 것을 위해 사는 삶으로 더욱 풍성해지면 좋겠습니다.

 

이 귀한 것을 어찌 제가 쓰겠습니까! 늘 그렇듯이 써야할 사람에게 전 전달하는 택배 기사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누군가의 횡경막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 택배 기사가 되겠습니다. ^^

예지야 고마워~~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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