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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같은 말은 용서입니다

기도와 같은 말은 용서입니다

 

 

 

 

 

 

 

 

 

 기도와 같은 말은 용서입니다(마6:5-15)


기도와 같은 말은 <용서>입니다.

기도의 반대 말은 <연기>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신앙생활의 가장 으뜸은 다른 사람을 도우는 것입니다.

내 영광을 위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구제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으뜸은 구제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도 자기의 영광을 얻기 위해 이용하는데

기도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두번째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을 이용합니다.

구제를 통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만 상대한다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믿는 대상을 향하여 하지 않고 사람을 향하여 보이기 위해 이용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쌓이면 어떻게 아는지 사람들은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도 많이 함을, 기도 잘함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옆사람에게 자꾸 알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내 영광을 위해, 내 이름을 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은 내가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반대말은 <눈치>입니다.

 

어쩔수 없이 기도하는 자리에 앉게되고,

다른 사람에 눈을 의식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외식하는 사람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외식의 의미는 <연기하는 >입니다.

기도를 한마디로 연기하듯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식이고

그것이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도가 쌓일수록 느는 것은

하나님이 갚으시고 응답하신 간증이 아니라

<연기>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늘수록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간증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가 높아집니다.

기도가 쌓일 수록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하나님이 응답하신 간증이 많아야하는데

<간증>보다 <가증> 늘어납니다.

<연기> 늘어납니다.

 

그래서 기도의 반대말은 연기입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실이 많아져야합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하는지 내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찾는지

숨겨야합니다.

 

내가 언제 기도하는지,

내가 언제 하나님을 부르는지,

시간을 기도하는지 알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을 기도하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시간을 기도하면 반드시 교회가 알게합니다.

세시간을 기도하면 세상이 알게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본질인 하나님이 갚으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람에게 상을 받으려는 본성을 이기지 못해서입니다.

기도의 시간이 쌓일수록 간증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자리가 쌓일수록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갚으시는 축복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꾸 알리려는,

자꾸 나의 선과 의와 기도를 통한 영광을 얻으려는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급기야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 다릅니다.

진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기도의 본질은 <용서>입니다.

 

기도는 용서입니다.

기도의 끝은 용서입니다.

 

주기도문의 방향은 용서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사람이 절대 없고,

외식 하는 사람이 절대 없으며,

감추지 않고 나타내려는 사람은 결코 이룰 없는 !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9)

 

 

주님은 기도의 시작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먼저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전제입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영광을 얻고 땅의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하늘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전제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기 전에 하나님이 이렇게 갚으신다고 하나님을 이미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

 

 

기도의 전제는 하나님이 갚으시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전제입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기도의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구할 것을 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는 기도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구할 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구할 것을 구하지 말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합니까?

것을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합니까?

 

첫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기도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도는 연기입니다.

 

<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을 받고,

사람에게 박수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진짜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을 진짜 믿는 사람이 하는 기도의 목적은 그분의 이름입니다.

 

자기의 이름이 아닙니다.

자기의 이름의 영광이 아닙니다.

 

인류의 관심은 자기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왕의 역사입니다.

왕이 누구냐입니다.

누구의 이름이냐입니다.

 

모든 인생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이유와 목적은 오직

<자기 이름>입니다.

잘못된 기도의 다른 얼굴은 <자기 이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땅에서 자기의 이름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자기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각오이고,

결심이고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천국을 걸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의 영광이 아닙니다.

 

이름으로 살던 것을 내려 놓을

영광을 위해 살던 것을 내려 놓을 성경이 말하는

낮은 자의 ,

섬기는 ,

빛과 소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이름이 아직 남았다면

여전히 우리는 군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는 오직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는 이유입니다.

 

둘째,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

 

 

나라가 임하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어제 페북에 어떤 목사님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의 나라가 끝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마무리 것을 다른 분의 글을 통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어떻게 해야 나의 나라가 끝이 납니까?

 

바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먼저,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무엇입니까?

주기도의 핵심을 소개하는 전제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

 

그것은 용서입니다.

인류에 주시려는 것은 구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구원은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땅의 <구원> 이루기 위해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은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되고

나라가 임하게 되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자를 용서하심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용서의 선행성입니다.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서 용서가 이루어지듯

땅에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용서가 이루어질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재림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용서입니다.

오직 땅에서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자꾸 땅에서 권세와 능력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아닙니다.

땅에서는 오직 용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후에 바로 용서에 대해 다시 설명을 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

 

 

주기도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기도> <용서>입니다.

 

 

다른 모든 곳에서 기도는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구하면 주시고 두드리면 열리고 찾으면 찾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기에 구하기 전에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전의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

 

 

이방인과 다른 기도,

이방인이 모르는 기도는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고 자꾸 기도해야 알기에

말도 많이 하고 자꾸 기도해서 얻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위한 전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나의 나라가 멈추는 길과 기도는 바로

<용서>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기도의 다른 말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는 <용서>입니다.

기도의 반대 말은 외식 <연기>입니다.

 

 

외식하며 기도하는 자가 결단코 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가르치시다가 주기도 용서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셋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약식이 과연 육체의 양식일까요?

 

구하기 전에 무엇이 있어할지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주기도를 가르치기 바로 전에 말씀하신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이 과연 우리 육신이 먹는 양식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삶을 살기 위한 양식,

용서를 위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구절 앞에서 그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무엇이 필요하지 아신다고 하신 주님이 육체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실까요?

 

물론 그것이 전혀 아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핵심은 용서를 위한 하늘의 양식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양식입니다.

 

양식은 먹을 양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그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4:32]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4: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6:27]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6: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일용할 양식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하늘에서 이루신 뜻인 용서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길인 십자가의 길을 말합니다.

 

양식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4:34)

그것은 바로 땅에 용서의 삶을 말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먹는 , 마시는 , 입는 것을 위하여 살지 말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라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

용서의 삶입니다.

 

기도의 끝은 용서입니다.

하늘의 용서가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넷째, 죄를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

 

 

그래서 우리가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사람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지은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고

아버지의 뜻이면 길을 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죄의 용서를 먼저 받은 사람,

하늘이 뜻인 용서를 먼저 경험한 사람이 제자입니다.

빛입니다.

소금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용서하고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의 모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

이미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 사는 ,

<용서>입니다.

 

 

우리는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합니다.

우리는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를 원합니다.

아니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과 힘은 용서의 힘입니다.

죄지은 세상을 향한 십자가의 능력은 용서입니다.

 

 

용서가 선포되고 이루어지는 곳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시험에 들게하지 마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

 

언제 시험에 듭니까?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때입니다.

용서해야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하고

가장 시험에 들게하는 길은 길을 고집하고

이름을 위해서 사는데 걸림이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주님의 나라가 아니라 나라이기 때문이고

주님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위해 살아서입니다.

 

용서의 길을 지나지 않으면 시험이 찾아옵니다.

요셉의 삶의 형통은 그가 용서의 길을 가서입니다.

 

욥기의 주제는 의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입니다.

의인의 마지막 단계는 용서 없는 친구들과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화목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42:10)

 

 

욥의 곤경에서 돌이키신 것은 그가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용서의 기도가 땅에 우리를 의인으로 세우고

용서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사단은 절대 못하는 !

용서입니다.

기도를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연기할 뿐이지

용서하지 못합니다.

 

빛과 소금,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전부를 채우심을 믿고

주님의 용서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사는 자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기도의 반대 말은 <연기>입니다.

기도와 같은 말은 <용서>입니다.

 

 

목회는 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의 허물을 덮고 사는 사람입니다.

선교는 주님의 용성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아니라

뜻과 목적이 있으면 결코 걷지 못하는 !

십자가입니다.

 

땅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도 힘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도 사라져갑니다.

 

오직 나만있고

나라만 있고

뜻과 목적과 미래만 중요합니다.

 

그것을 십자가에 박아야합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용서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이름이 거룩하여 지는 길…

 

 

 * 남천교회를 거쳐가신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정은혜 사모님을 모시고 가덕교회에서 만남을 가졌습니다.

길게는 10년이 훌쩍 넘은 사역자도 있습니다.

정상용목사님과 사모님, 김명재목사님과 사모님,

전병덕목사님과 사모님, 이성주목사님과 사모님,

조흥래목사님과 사모님, 이성주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저희 가정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그들의 목회현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