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은 <숨>에서 옵니다 (마6:1-4)
믿음의 길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입니다.
모든 신앙행동의 동기와 의도가 결국 자기의 의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시작하며 팔복을 말씀하신것은 빛과 소금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름으로 설명하지 않고 <증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은 세상에서 살 때 증상이 있습니다.
그 증상이 팔복의 마음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고, 마음이 청결하고…..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결과가 복이 아니라 증상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다른 것이 증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증상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빛과 소금됨을 결과로 말하지 않고 먼저 증상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빛과 소금은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는 다른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그 의는 천국을 걸고 이야기하는 의입니다.
그들과 다른 의를 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의>입니다.
그 의가 얼마나 중요하지 예수님은 천국까지 걸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의가 무엇일까요?
그 의는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의입니다.
그 <의> 가 무엇입니까?
첫째, 그 의는 <형제>를 향한 의입니다.
형제를 <세우는> 의입니다.
죄된 세상의 시작은 자기 중심적 의입니다.
자기를 세우기 위한 의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의입니다.
그 세상에 자기가 아니라 형제를 세우는 의를 말합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의입니다.
빛과 소금의 삶의 본질은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을 건 의입니다.
그런데 오늘 6장에는 이 의를 행하는데 가장 걸림이 되는 것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과 소금의 의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믿음에 근거한 의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결단코 하지 못하는 것,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하게되는 것,
하나님만 의식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데 죄인의 의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는 한마디로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오직 사람을 의식하는 의입니다.
모든 삶의 동기가 이 세상 사람입니다.
이 세상입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나쁜 말을 듣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자기의 인생의 꿈을 이루는 배경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의,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뭔가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둘만의 <비밀>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은,
셋째, 믿음의 세계는 하나님과 만의 비밀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의 첫번째 걸림돌은 바로 구제입니다.
가장 사람에게 보이기에 좋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좋은 것은 구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할 만큼 자기 의를 나타내기에 좋은 것이 구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제에 있어서 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유는 우리 신앙의 동기가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을
<비밀화>하라는 것입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4)
우리의 신앙행위를 비밀화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행위의 동기가 하나님이어야함을 말합니다.
그것이 <사람에게>로 바뀌는 순간 사람을 통한 영광을 얻는 순간 그것은 믿음의 걸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구하는 사람,
사람에게 보이려고 모든 의를 행하는 사람,
하나님이 비밀리에 채우시는 갚으시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음>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단어입니다.
사람을 향하고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마음의 배경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과 소금된 우리에게 이것을 조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겨우 착한 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겨우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루게 하라는 정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을 가고 안가는 정도로 중요한 문제,
바로 믿음에 기인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은
결코 사람에게 보이려거나 사람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 때문에 행해지는 일입니다.
구제는 하나님을 의식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가장 첫번째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의 영광을 위해 가로챌 때 가장 사용하기 좋은 도구이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하나님이 갚으심을 믿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2)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핑계해서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구하는 영광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주목하여 받수 칠 때 마다 사람들을 떠나셨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구하셨습니다.
그 영광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왕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면류관입니다.
사람이 만든 왕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알기에 걸을 수 있는 길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을 만드는 길입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는 모릅니다.
그런데 조금 나의 의가 쌓이고
나의 공로를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부터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저지른 믿음 없는 공개화된 영광을 얻을 욕심에 빠집니다.
그 욕심이 우리를 천국에도 못들어가게 하고 상도 받지 못하게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게합니다.
구제를 안하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이 일으키는 문제가 훨씬 큽니다.
구제를 많이 하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
박수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이 알게되는 순간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채움과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우리의 의입니다.
그 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것입니다.
내 의는 죽이라는 것입니다.
내 의는 감추라는 것입니다.
내 의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할 만큼 숨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갚으실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감추는 일입니다.
우리는 알리는 일보다 감추는 일이 습관이 되야합니다.
사람이 갚은 영광은 아예 버려야합니다.
사람이 알아주는 박수는 그냥 포기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박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감추는 일입니다.
<믿음>의 다른 말은
<감춤>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 감추고
하나님이 계산해 주시는 갚으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감출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십니다.
하나님이 갚으시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이 갚으실 것을 믿지 않고 사람들의 박수와 영광을 더 믿는 사람이
오른 손이 한 것을 오른손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갚으심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사람과 샘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샘을 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구제를 해야합니다.
구제는 사람의 영광을 가장 빠르게 얻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강력하게 얻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구제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갚으심을 가장 은밀히,
비밀리 얻는,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신앙의 기쁨을 아는 길입니다.
<믿음>의 다른 말은 <감춤>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같은 말은 <자기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감춤과 자기 영광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하나님은 그 방황의 길을 멈추라고합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그렇게 하라고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살아가는 우리 모든 짐을 내려 놓는 것,
하나님이 갚으시고 채우심을 믿기에 사람에게 보이려는 모든 짐과 멍에를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 쉼입니다.
<쉼!>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을 내려놓을 때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쉼> 의 반대말이 <사람에게 보이려고>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쉼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삶을 내려 놓는 것이 믿음이고
그 결과가 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에게 얻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쉼입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만 샘을 하는 마음,
쉼입니다.
쉼은 숨이 찾아와야합니다.
하나님의 숨을 느껴야 쉼이 찾아옵니다.
성령의 호흡,
생기가 찾아와야합니다.
생기는 숨입니다.
숨이 찾아와 내 안에 머무를 때 쉼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호흡하는 것,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식하고 사는 믿음의 걸음이
숨결입니다.
그 <숨결>의 결과가 <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호흡하는 숨결과 그로 인한 쉼입니다.
숨을 쉴수 없는 세상에서 수 많은 그분의 백성이 말라갑니다.
숨을 쉴수 없기에 쉼도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라라"
숨은 쉼으로 인도합니다.
이 땅에서 유일하게 성령과 숨의 호흡으로 사신 믿음의 걸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삶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호흡하는…
숨을 쉬십시오.
그리고 쉼을 얻으십시오.
주님이 오신 이유는 그것입니다.
*지난 두주동안 한숲교회에서 지냈습니다.
김동인목사님 교회에서 새벽과 수요, 주일예배를 섬겼습니다.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저에게 쉼이고 숨이었습니다.
그곳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함께 숨을 쉬고 쉼을 누리는 시간이었기를 기대합니다.
각종 모양으로 저희 가정을 섬겨주신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일일이 다 인사를 못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음에 갚을 길이 또 있기를 기도합니다.
늘 그렇지만 함께함은 축복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