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닙니다 형제입니다. (마5:13)
우리는 빛과 소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빛과 소금의 존재를 생긴 모양으로 증명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마음으로 증명합니다.
빛과 소금의 힘으로 증명하지 않고 빛과 소금이 세상에서 살면서 당하는 마음으로 증명합니다.
아홉가지 복을 통하여 그것이 얼마나 복이 있는지 설명하고
그리고 이제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5:14)
마음의 상태로 빛과 소금을 증명합니다.
일로,
업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빛과 소금이 마음의 상태를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합니다.
그것은 밟히고 덮혀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15)
소금이 맛을 잃고 빛이 사라지면 소금이 소금이 되지 않고 빛이 빛이 아닌것이 아닙니다.
다만 밟힐뿐이고 말아래 두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혹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지 고민합니다.
아닙니다. 자녀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밟히고 말 아래ㅍ두는 일이 생길 뿐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목적을 상실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천국을 가느냐 목가느냐가 되면 안됩니다.
이미 빛과 소금이라면 빛과 소금의 목적을 찾아야합니다.
소금과 빛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빛과 소금의 목적은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광채가 아닙니다.
자기의 맛이나 자기의 영향력이 아닙니다.
최종 목적, 최종 방향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맛으로 빛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행세하려합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자기 영광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반드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자기의 영광을 스스로 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삼위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성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성부를 철저히 자신의 맛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적이 없습니다.
철저히 다른 사람을 통해, 맛을 회복한 빛을 회복한 사람을 통해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수줍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성령을 통해서 영광을 거두십니다.
성령을 통해 자기의 본체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령께 자기의 자리를 내어주십니다.
성령은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자리를 자기가 채우시지만 철저히 성령 자신의 얼굴을 숨기십니다.
얼굴없는 영광입니다.
그 얼굴의 실체는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의 얼굴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선명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에 고생만으로 채워진 예수님의 삶의 수고와 대가를 마지막에
심판의 자리에 앉히셔서 보상하십니다. 그 영광의 심판자리를 예수님에게 내어주십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섬김의 광채입니다.
삼위하나님의 성품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취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십니다.
빛과 소금으로 부르시고 부르심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16)
이유는 하나님은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로 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분의 성품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법이 그렇습니다.
서로를 통해 서로의 영광을 세워가는 법입니다.
빛과 소금의 존재는 이 법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를 통해,
우리의 맛과 밝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삼위 하나님의 서로를 세우는 겸손의 법을 알아야합니다.
빛과 소금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길은 나를 통해 서로의 영광을 세우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사는 법이어야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5장의 결론은 온전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그 온전이 무엇인가?
그 온전의 과정이 무엇인가?
온전할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그 온전의 대상은 바로 <형제>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함은 서로에게 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통해 온전함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온전함은 <형제를 통하여>입니다.
빛과 소금의 삶을 위해 지금까지 살던 율법을 설명합니다.
율법의 외형적 법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형제를 향한 마음입니다.
율법을 설명하기 위해 몇가지 가장 중요한 법을 설명합니다.
살인과,
간음과,
맹세와,
눈은 눈 이는 이로 갚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바로 <형제>입니다.
율법이나 선지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
율법의 완전,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형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
내가 어떻게 그 형제를 대하느냐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곧 형제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고 그 영향력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형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영광을 돌린다는 소리를 하는것은 맞지 않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자신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영광을 돌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영향을 받은 형제가 나를 통해 형제의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내가 돌리는 영광이 아니라
나를 통해 형제가 나의 빛과 소금의 맛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업적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합니다.
그래서 옆의 형제를 무시하고
옆의 형제를 죽이고
옆의 사람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십자가에 목박고
나를 죽이고
나를 이용해서 형제를 세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속성은 삼위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녹이고 내어 주고 숨겨서 상대의 영광을 드러냄 같이
자신을 녹이고 자신을 감추어서 형제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착각합니다.
내가 나를 통해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나를 통해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냥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나를 통해 세워진 형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다시 영광의 자리를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뭔가를 잘해서 영광을 돌린다는 착각은 버려야합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앉고,
내가 유명해지고,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어떤 세상적으로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만 영광을 돌리는 길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란걸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냉수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냉수 한그릇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냉수는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채우는 마음의 시작입니다.
형제를 통해 영광을 돌리는 마음의 통로입니다.
냉수는 영광의 보좌로 나아가는 빛과 소금의 마음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자신이 취한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왕을 삼으려할 때 다른 곳으로 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 바다로 가셨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철저히 자신의 영광을 자신이 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돌리셨습니다.
그 영광은 다른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섬긴 사람들,
내가 섬긴 형제들의 고백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나의 영광은 다른 사람이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목적은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얻는 법은 다른 형제를 통해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그 형제를 향하여 욕하고 라가라하고 미련하다하면
그 형제를 통해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
다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으로 바로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형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 사람만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영광>의 반대는 <자기애>입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천국백성이 사는 법은
삼위 하나님이 사는 법입니다.
빛과 소금이 사는 법은
세상에 맛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형제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의 녹아짐과 다른 사람을 밝게하는 빛의 삶을 통해
형제들을 통하여 받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빛과 소금의 습성입니다.
맛을 본 사람이,
빛을 본 사람이 그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나의 수고를 통해 형제가 복을 얻는 것입니다.
죄냐 죄가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이냐 거룩이 아니냐
영광이냐 영광이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아야합니다.
시대가 어둡습니다.
그래서 작은 수고에도 빛은 밝고 소금은 영향력이 깊습니다.
우리는 빛이고 소금입니다.
형제를 위한 일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 남천교회 1청년회입니다.
6월 1일 결혼을 앞둔 김진훈 오미경이의 시골텃밭에서 1청년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서로를 섬기는 모습에 참 감동이었습니다.
작은 정성을 준비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선물을 준비해서 형제를 섬기고
선생을 섬기는 마음이 참 이뻤습니다.
그런데 작은 몇 명의 사람들이 이 일들을 준비합니다.
몇 명의 사람을 통해 공동체가 복을 얻고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십니다.
늘 그렇습니다.
빛과 소금은 많은 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몇 명의 사람,
몇 명의 숨겨진 얼굴로 일할 때 그 공동체 사회는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리리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몇 명의 사람,
겨우 있을 몇 명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그 몇 명이 여러분입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서로의 영광을 세우는 일로 오늘 하루도 행복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채우시나를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형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채우실지 기대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늘 믿음이 있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