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는 <입장바꿔>이다.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팔복중에 두번이나 "의"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고...
산상수훈은 너희는 빛과 소금으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빛과 소금을 먼저 말하지 않고
빛과 소금이 당하는 속성을 먼저 선언한 것이 팔복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빛과 소금이다라고 먼저 말하지 않고
빛과 소금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특성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의>입니다.
산상수훈의 배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흐르는 내용은 <의>입니다.
팔복에서 두번 언급한 의,
그리고 바라새인과 서기관과 다른 의를 가지지 않으면
천국에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존재론적 관점에서 의를 거듭 설명하고
다시 행위론적 관점에서 의를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6:1)
산상수훈은 계속해서 의의 관점에서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가장 중요한 말중에 하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라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6:1)
결국 산상수훈은 빛과 소금을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대조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의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를 대조합니다.
그래서 이 의가 결국 어디까지 가느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까지 연결이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6장은 이 남에게 보이는 것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풀어야하는지 설명하는데
5장의 팔복 이후에 주어진 말씀은 이 의의 깊이와 정신을 설명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5장에서는 존재론적 차원의 접근을 하고
6장은 행위론적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까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20)
도대체 어떤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가고
도대체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의는 무엇입니까?
먼저 그 반대를 설명합니다.
의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려는 것입니다.
<의>의 반대는 <남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의의 반대는 <외식>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장 큰 문제는 남에게 보이는 것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안목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의의 반대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입니다.
참 의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5장은 율법 즉 사람관계의 최소한의 문제를 넘어
그 정신이 어떤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살인에서 의가 말하는 살인의 정의를 말씀하고
율법이 말하는 간음에서 의가 말하는 간음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과 소금은 다른 사람이 보이려고 사람의 시선과 눈을 초월하는 삶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를 넘어선 삶이 의입니다.
그래서 5장의 결론을 <온전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의의 문제는 온전하심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온저하심과 같이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외식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큰 죄의 문제를 남에게 보이려고라는 것,
외식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의는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하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6장까지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5장까지의 존재론적 결론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눈을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는 것,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는 것이 의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때 우리에게 천국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보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이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온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사람을 보면 믿음이란 단어를 쓰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맺는 단어가 믿음입니다.
그래서 8장부터 믿음의 사건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의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그 의의 시작은 믿음이고
의의 과정은 온전함입니다.
의의 방향은 어디일까요?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무엇일까요?
율법을 한마디로 말하고
선지자들이 말하려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의입니다.
그 의를 설명하기 위해 산산수훈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예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가장 중요한 단어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받고자 하는대로> 입니다.
한마디로 네가 원하는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산상수훈의 빛과 소금,
의의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기대하면 먼저 용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용서는 내가 해야 내가 받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대로 내가 행한 것이 곧 의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상대방에서 먼저 해주는 것이 의입니다.
형제에게 용서하는 것이 무슨 지옥불에 들어갈 일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2)
이 정신 즉,
율법과 하나님의 형상의 원 정신은
<상대방의 입장> 입니다.
이 정신을 빼고 행한 모든 권능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능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예수님께 욕을 먹고 혼이 났는가?
지옥백성이라는 말까지 듣는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행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빛과 소금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하나님 되심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시고 들으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의는 우리를 위해입니다.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 행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담을 허셨다는 것이고
길을 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입니다.
모든 산상수훈의 핵심은 이 정신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입니다.
그래서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고
오른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가지고 예배를 가다 원망할 일이 생각하면 예물을 두고 돌아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형제의 입장에서입니다.
그것이 화목의 시작입니다.
화목은 내 입장에서가 아닙니다.
화목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입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우리도 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무엇인가?
그건 상대방의 입장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가가 가르치던 내용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정신이 없습니다.
귀신도 쫓고,
능력도 행하고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섬기는 것은 없습니다.
섬김도 나의 입장에서 섬깁니다.
봉사도 나의 입장에서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입장에서가 아니가 우리의 입장에서 들으시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의를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채우면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신다는 믿음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는 믿음이 먼저이고
그 믿음을 전제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섬기고 수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높아지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높여야합니다.
내가 잘 살려면 다른 사람을 먼저 잘 살게 해야합니다.
축복을 많이 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집에서 먼저 축복을 빌고 평안을 빌어야합니다.
내가 사는 길은 다른 사람을 먼저 살려야합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비판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이 비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 것이 곧 나의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그것이 율법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식하고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먼저 채우는 것이 의입니다.
그것이 산상수훈의 의이고 정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결론을 내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것을 채우면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채우지 않으면 내것도 채워지지 못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채우기 위해 박해를 받을 때 하나님은 천국을 축복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믿음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서 완성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결론을 이렇게 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이 정신이 없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수고해서 내것을 채우는 사람은 아직 믿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입장을 위해 섬기고 대접하고 세워갈 때 하나님은 나를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 용서하시고
내가 먼저 축복을 빌어야 그 축복이 하나님께서 갚으시고...
하나님께서 갚으시리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갚으시리라는 계속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4, 6, 18, 32, 33 절에서 반복적으로
기도에 대해
금식에 대해
구제에 대해
보물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일일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장바꿔 생각해서 대접하라 하시면서
먼저 무엇을 강조하시냐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그렇게 살면 먼저 갚으시고 대접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면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고
구제에 대하여 채우시고
보물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쌓아주시고
인생도 하나님이 염려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입장에서 다시 채우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일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입장에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입장바꿔>입니다.
입장바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모릅니다.
자기만 남는 생각,
자기의 입장만 고집하는 사람에게 믿음은 없고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외식만 남습니다.
그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잘 보이려는
세상에 자신을 잘 보이려는 것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박해를 받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면서 핍박을 받는 사람이 천국이 저희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입장바꿔>입니다.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입니다.
* 신대원 동기목사님이시고 여수 묘도의 묘창교회를 섬기는 이우원목사님 가정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함께 집사님 부부도 귀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드리고 다녀왔습니다.
선교사가 먼저 연락을 드리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함께 나눌 꿈이 있고 위로가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귀한 시간 함께 했고 귀한 섬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목사님은 아낌없이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사십니다.
작은 섬에서 삶에 찌들고 아픔으로 사는 성도들을 싸매고 돌보는 일에 전부를 거십니다.
자신들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보면 하나님이 목사님을 이곳에 보내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저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를 알게됩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성한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가 가시는 목사님과 사모님을 보며 얼마나 감격이 되는지요.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입장,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드릴 때 하나님은 생각지 않은 삶의
풍성함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방법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 삶을 사시는 목사님의 삶을 보니 오늘도 감사와 감격이 풍성합니다.
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가 받기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금의 맛이고 그것이 빛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