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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입니다(마5:5)

팔복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입니다(마5:5)

 

 

 

 

 

 

 

 

 

 

 

 

 

 

팔복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입니다(5:5)

 

팔복의 핵심은 우리의 상태가 아닙니다.

팔복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조건을 걸고 그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향한 산상수훈이 제자들이 예수를 선택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선택해서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이 팔복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바로

<천국>이고,

<부활>이고

 

오늘 <온유한> 사람이 받을 <땅>입니다.

 

하나님은 천국과 부활을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기 위해 제자들을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도록 만드십니다.

오늘 주님은 또 땅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온유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11:29)

그리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했다.

왜?

전제가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했다.

 

 

온유하면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가?

모세이다.

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 했다.

 

[민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런데 생각해보라.

모세가 진짜 온유했는가?

그는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같이 열 내고 화내고 했다. 그런 그를 왜 하나님이 온유하다고 인정하셨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함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온유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함이다.

다윗을 평가할 때 마음에 합한자다라고 할때 전제가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다라고 한다.

 

[행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모세에 대한 평가도 앞에 단어가 빠졌다. 바로 마음에, 보기에 라는 말이다.

다시 보자.

 

" 사람 모세는 ( 보기에, 마음에)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여기서 온유함이 뭔가?

온유함이 뭐길래 모세에게 예수님에게 단어를 사용하나?

예수님 자신 스스로 단어를 사용하고 있나?

온유함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에 없이 자신을 죽이고 순종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온유이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 하나님의 마음을 따름이 온유이다.

 

모세가 광야 40년동안 받은 훈련은 훈련이다.

가라고 가고 서라고 서는 훈련, 그것을 성경은 온유라고 말한다.

 

산상수훈에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했다. 땅은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

정복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전쟁은 하나님께 있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은 스스로 싸워서 자신의 의지나 생각이니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을 따를 받은 상징이 가나안 땅이다.

 

예수님은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다 했다. 이유는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

온유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생각을 따라 시킨 말하고 명령한 것만 하신 것이다.

 

땅에서 사신 예수님의 사역원리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따르고

말하고 명령을 행하신 삶을 사신 것이다.

 

한마디로 온유는 사람에 대한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단어이다.

하나님이 음성과 생각에 생각을 내려놓고 나아가는 성품을 말한다.

 

 

번째는 신을 벗는 것이다.

신을 벗는 목적은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땅은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으로 얻게된다.

그런데 신을 신고 내가 계획하고 방법대로 판단대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온유의 단계는 신을 벗는 것이다.

신을 벗지 않으면 땅은 결코 얻지 못한다.

 

하나님이 주기 원하시는 것은 잃어버린 ,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땅이다.

땅은 온유한 사람,

신을 벗은 사람만 얻게 되는 장소이다.

내가 심지도 뿌리지도 짓지도 않는 열매와 집과 보화를 얻는 ,

그곳이 하나님의 땅이다.

 

온유한 자가 얻는 것은 땅입니다.

온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온 단어이다.

우리가 아는 사람에 대한 성품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응,

신을 벗는 것이 온유이다.

 

온유의 목적은 땅이다.

제자는 자기의 발의 신을 벗은 사람들이다.

계획,

목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예수님은 사람 사람 부르시고 그들에게 오늘 팔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땅을 하나님이 다시 차지하게 하신다.

 

"[삼상17: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전쟁을 통해 얻는 것은 땅이다.

전쟁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

오직 그분께 속한 것이다.

 

땅을 얻기 위한 전쟁의 도구는

우리의 온유이다.

 

칼과 창이 아닌 오직 우리의 온유로 그분의 땅을 얻게 하신다.

천국도 마찬가지다.

천국,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마음이다.

부활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슬픔이다.

가난한 심령에 천국이 임하고

슬픈 인생에 부활의 소망을 주고

온유 속에 그분의 땅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나라는 부자가 얻게되고

부활은 세상에서 사람이 받게되고

땅은 있는 자가 받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받고

애통하는 자가 부활을 통한 위로를 받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받게 되는 것이 영적인 원리이다.

 

팔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나씩 설명하는

하나님 나라 영적 요약서이다.

하나님이 주기 원하시는 목록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오늘 내가 얻을 땅을 위해 싸우지 말고

온유해야한다.

그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내가 생각하는 상식의 <창과 > 아니라 <온유>이다.

온유는 사람과의 관계적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 단어임을 기억해야한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땅이 저희 것임이요…"

 

 * 아내와 가덕도 산을 오릅니다.

새로운 땅을 밟는 것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내가 길을 내서 가는 것보다

정해진 이정표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길을 가장 아는 사람들이 이정표를 만들고

이정표에 순종하는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땅은 온유함으로 얻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한번도 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렇습니다.

그런 길을 가고나면 몸에 상처가 남습니다.

흔적이 남습니다.

피가 나고 상처가 나고 온몸이 무겁습니다.

가장 쉬운 ,

땅을 밟는 가장 좋은 길은 이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때로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해놓은 이정표를 따른 것이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땅으로 가는 가장 바른 길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온유라고 말합니다.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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