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부대로>라는 <터널>을 지나야 한다(마1:18-25)
"창1:2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령이 먼저 일하신다.
창조를 하시기 전 성령은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준비이다.
세상을 구원하기전 성령은 마리아에게 먼저 찾아가셨고,
요셉을 먼저 찾아가셨다.
찾아가신 성령, 일하시는 성령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성령이 일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두려움을 없앤다.
인간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세상에서 의로움의 끝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두려움을 버리기 위해 선한 일도 가만히 끊으려한다.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했다.
그러나 그 의로운 요셉도 문제가 드러나자 해결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끊으려했다.
세상의로움의 답은 조용히 끊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그 끊으려는 본질을 두려움이라 했다.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의로움의 방법은 늘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의로움은 피해가지만 하나님의 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먼저 오셔서 해결하시는 것은
둘째, 죄의 해결이다.
성령의 잉태는 예수님의 탄생이다.
피해가지 않고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일하심은 곧 죄의 해결이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를 해결 하지 못하는 의로움은 늘 두려움에서 산다.
늘 우리는 두렵다.
아무리 잘 살아도 우리의 끝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의 원천인 죄를 해결해 주시는 은혜가 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이 있다.
셋째, 그 죄의 해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함께함이다.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미리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이다.
두려움을 없애고,
죄를 해결하고
함께함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이 세가지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안을 주셨다.
부활하고 처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평안하라>이다.
아무리 우리가 잘 살아도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온다.
수시로 찾아오는 인간 본질의 두려움은 어떤 것으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 두려움의 본질은 오직 하나님의 평안, 하늘의 평안만으로 해결된다.
그래서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하고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해결해 주셨다.
죄가 해결되어야 하는 결정적 이유는
하나님의 <함께함>이다.
죄를 해결하는 이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오직 한가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함이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세가지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내 삶에 <분부대로> 를 지나야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반드시 내 삶에 분부대로 라는 길을 지나야 이룰 수 있다.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하나님도 일하시고
성령도 미리 수면 위를 운행하시고
예수님도 모든 것을 이루셨지만
그러나 내 삶에 분부대로 행하는 다리를 지나야한다.
내 삶이 두렵고
늘 죄에 빠져 아파하고
함께하는 축복의 삶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부대로>라는 다리를 지나지 않아서이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분부대로라는 천사의 말을 지나지 않았다면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 의로운 사람이나
늘 두려움에 사는 삶이 된다.
그 두려움을 믿음이라는 희망을 잡고
분부대로의 <터널>을 지나야하는 것이다.
분부대로는 다른 두려움이다.
자신의 의로움을 믿고 두려움을 감추고 살면 영혼의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하지만
분부대로라는 다른 형태의 두려움의 터널은 희망을 향하는 발걸음이 되는 것이다.
요셉은 분부대로라는 터널을 지나면서도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인간 본질의 두려움을 다른 두려움이다.
그 터널의 두려움은 설레는 두려움이다.
인간 본질의 두려움은 영혼을 삼키는 두려움이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서 설레는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이다.
생명을 삼킬 것 같은 두려움으로 가만히 모른체하는 의로운체하는 삶을 살것인지
두려움을 해결하고 죄를 해결하고 창조를 이룬 함께하는 은혜를 누리고 살것인지는
<분부대로>의 다리를 지나느냐 지나지 않느냐로 결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잘 살아도 자신의 의로움 안에서 산다.
그 의로움의 끝은 늘 두려움이다.
이렇게 살면 내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분부대로 사는 삶은 늘 평안이고 임마누엘이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는 하늘의 평강이 우리 안에 넘친다.
우리가 잃은 것은 천국이 아니라
하늘의 평강과
하나님의 함께함이다.
그것은 늘 <분부대로>를 잃은 아담처럼
분부대로를 지나지 않은 모든 인간의 동일한 문제인 것이다.
천국이 없는 것이 아니고
평안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축복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내 삶에 아담처럼
<분부대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에덴 동산이 아니라
내 삶의 <분부대로>가 회복 되는 것이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겸손과 한 발 걸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세로운 창조를 이끄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 하루의 삶에 이 분부대로가 회복되는
에덴의 삶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한다.
* 남천교회가 입당을 했습니다.
39년 만에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첫 예배의 감격과 은혜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수고와 기도와 헌신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건물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건물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은
너무도 귀한 일입니다.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수고한 모든 주의 사람들에게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