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를 통해 읽어야 할 것(마1:1-17)
사람의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족보,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읽어야 할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방향입니다.
역사가 어디로 향하는가 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가는 방향을 읽어야합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는 세상의 왕을 향합니다.
세상의 역사는 왕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향하는 곳으로 갑니다.
구약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그것이 방향입니다.
어떤 인생도 향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해야합니다.
그래야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지 않는 인생은 세상의 역사, 사라질 역사가 됩니다.
둘째, 열심을 읽어야합니다.
족보를 통해 읽어야하는 것은 누가 누구를 낳는 지루함이 아니라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읽어야합니다.
그분의 열심, 그분의 열정을 읽어낼줄 알아야합니다.
세상을 향한,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읽는 눈이 생길 때 족보를 통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자격의 문제입니다.
셋째, 자격입니다.
성경의 족보에는 아브라함부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다윗도 그러합니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여인들인 다말,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자손입니다.
다윗은 형들에 비해 너무 어렸습니다.
다말도 룻도 이방여인이고 우리야의 아내와 마리아도 다 남자의 세계에 낄 수 없는 여인입니다.
죄를 지은 모든 족보의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자격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을 읽어야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꾸
<자격>을 따집니다.
자격보다 큰 것은 <방향>과 <열심>입니다.
큰 사람이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가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람, 큰 교회라는 자격을 우리는 갖추게 되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줄 생각합니다.
자격을 갖추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큰 일을 할 자격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자격 없는 자를 부르셔서
나의 이름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늘 자격 없는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열심의 근거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고 다윗이고 솔로몬이고 다말이고 룻이고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늘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에서 자격을 따려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원하는 기준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열심에 합당한 사람은 잘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이고 세상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세상은 자격을 원하고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원합니다.
세상은 자리에 맞는 자격을 위해 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하는 방향성,
즉 그리스도만을 향하는 상한 마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고
세상은 섬김 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자를 부르시고
세상은 이름 있는 자만 기억합니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자격 없는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읽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놀라운 그 일에 나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열심 앞에
그리스도를 향하는 방향성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나를 향하는 인생, 세상의 역사를 따라가게 됩니다.
자칫하면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를 향하고 세상을 향하는 역사를 만들게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방향은 그리스도여야하고
우리의 자격은 <자격 없음>임을 기억해야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특별함이 아니라
<자격 없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자격을 위해 살지 말고
자격없음에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방향이어야합니다.
자격을 위해 사는 인생과
자격 없음에도 살려는 인생은 천지 차이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자격이 아니라
자격 없음에도 감격으로 살았던
<상한 심령의 방향성>입니다.
삶의 정황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인생이 그리스도를 향할 수 만 있다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루를 통해 놀라운 그분의 이름을 높이실 것입니다.
자격을 찾지 말고
자격 없음으로 사는 감격의 눈물로 사십시오.
그 눈물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잉태하심과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펼쳐 질 것입니다.
* 소나무와 덩굴이 함께 엉켜서 삽니다.
이유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산다는 것 앞에서 어떤 것도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덩굴은 늘 상한 심령으로 소나무 옆에서 살아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하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감사와 감격의 마음은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자신의 터를 내어준 소나무와 함께 하는 덩굴이 오늘은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름!
<자격>이 아니라 <함께>입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따지지 않고 그냥 동행하는 함께가 아름다운 이유는
함께함을 통해 생명이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