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자들의 일상(행26:1-16)
<종>과 <증인>으로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무슨 일을 하게 하시는가를 주목해야한다.
첫째, 불러내어 다시 보낸다.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증인으로 세우시기 위해 지금 있는 상태에서 살지 않도록 구원하신다. 지금 있는 <상태>라는 것은 내가 처해있는 모든 이전의 상태 즉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든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음으로 스스로 주인으로 살아가므로 말미암는 모든 문제 속에서 구원해 내시겠다는 말이다. 스스로 주인 되려고 할 때 나타나는 모든 갈등과 아픔과 눈물과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구원하여 내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시 그 속으로 보내시겠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내어>"
회복은 곧 사명임을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의 사명은 세상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부름은 곧 회복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곧 다시 사명을 가지고 그 속으로 다시 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하시는 이유, 구원하시는 이유는 그 속에서 나와 다시 그들에게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전하기 위해 생명되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다시 보내는 것을 말한다.
보냄이 없는 삶은 아직 회복의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치유의 상태를 지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보내시기 위해 우리를 회복하신다.
바울을 이스라엘과 이방으로부터 구원한 것은 그들에게 다시 보내시기 위함임을 기억해야한다.
가정이라는 아픔의 장소에서 우리를 회복하시고 세상이라는 눈물과 전쟁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것은 소망과 회복의 하나님으로 다시 그들에게 그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냄을 통해 반드시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
둘째,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첫 번째 일은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예수님을 보냄으로 일어나는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보지 못하던 자가 보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십일 시험을 받고 회당에서 스스로 성경을 찾아 읽어준 말씀이다.
"눅4:17-18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사역을 <자유>와 <보게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보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눈을 뜨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것을 말한다.
육체의 눈은 다만 영적인 눈의 부분이다.
예수님처럼 바울을 부르실 때 그를 통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로 <보게됨>이라는 것이다.
눈을 뜸으로 보지 못하던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니 육체적으로 봐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가덕도 산에는 수없는 약초와 더덕 도라지 더구나 산삼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보는 눈이 없으니 이게 풀인지 더덕인지 산삼인지 모른다.
봐도 풀이지 약초는 아니다.
볼 눈이 없어서 눈이 열리지 않으니 그냥 풀인것이다.
눈이 열려야 하늘이 보이고 땅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이고 사람이 보인다.
죄가 보이고 영생이 보이고 구원의 길이 보여야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영적인 것이 보이지 않으다 다만 육체의 눈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바울을 부르실 때도 가장 먼저 눈을 열게 하시는 일을 위해 보내시는 것이다.
보냄의 목적은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은 일이 아니라 눈을 뜨게 해야한다.
일은 눈을 뜨게 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을 위해 일하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일차적 목적은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오늘 일이 눈을 뜨게 하는 일인가 아니면 육체의 눈만 따라가는 일이지 구분하며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가?
셋째 그것은 눈을 뜨느냐 안뜨냐는 빛이냐 어둠이냐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빛이냐 어둠이냐는 눈을 뜨므로 나타나는 결과다.
언제 어둠이 되고 언제 빛이 되는가는 눈을 뜨므로 결정된다.
내가 어둠에서 빛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어둠에서 빛이 되는 것이다.
볼 수 없으면서 보는 것처럼 살 수 없다.
봐야 빛이다.
눈을 뜨느냐 안뜨느냐는 내가 어둠이냐 빛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내가 오늘 무엇을 보는가를 고민해야한다.
내가 오늘 무엇이 보이는가를 객관적으로 살펴야한다.
돈이 목적인 사람은 돈만 보인다.
음식이 관심인 사람은 음식만 보인다.
건강이 관심인 사람은 건강정보만 보인다.
육체의 정욕이 관심인 사람은 정욕적인 것만 보인다.
음란이 관심인 사람은 음란한 것만 보인다.
영원인 사람은 영원한 것만 보인다.
영원의 관점으로 봐지는가 육체의 관점으로 봐지는가?
그것이 빛이냐 어둠이냐를 눈뜸의 열매다.
넷째, 눈을 뜨는 것은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눈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하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빛을 보고 자신이 보던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빛을 보고 자신의 눈이 뜨이게 된것이다. 육체의 눈이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눈이 뜨인것이다.
그 겨로가 사단의 권세에서 사단의 종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8)
다섯째, 기업이 되게하신다.
기업은 하나님의 재산을 상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이다.
누가 받는가? 보는 사람이 받는다.
하나님의 기업은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만 받는다.
그래서 나를 믿어라고 기록한다.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8)"
하나님을 보게 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믿게 된다.
이전에는 믿지 못했는데 믿어진다는 것이다. 보니까 믿어진다.
믿으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니까 믿어진다.
보이면 믿어지고 믿어지면 기업을 얻는다.
당연한 결과다.
보게 된다는 것이 이렇듯 빛이냐 어둠이냐를 결정하고
사단의 권세에 있느냐 하나님의 권세에 있느냐를 결정하고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사람이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무엇을 보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그것이 우리의 전부를 결정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은 보이는대로 산다.
육체가 보이는대로 살면 육체로 살고
영원이 보이면 영원으로 산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말한다.
본 것을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느냐?
"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삶은 단순하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말한다.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다.
본 자만 가고
본 자만 말하고
본 자만 살게된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한다.
나는 성령행전을 풀이하면
<본 자들의 일상>이라 말하고 싶다.
본 자들에게 이것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다
봤기에 그냥 그렇게 사는 삶.
그것이 하늘의 삶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보게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 서울에서 살던 주희가 시집을 가려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가덕도까지 나를 방문하러 왔습니다.
이목사님 가정과 점심도 저녁도 먹었습니다.
누구랑 함께 먹느냐가 음식 맛을 좌우합니다.
어제 먹은 점심 저녁은 참 맛있었습니다.
함께한 가덕도의 야경도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습니다.
걸어가는 주희의 삶이 이렇게 이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