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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이 될지 <주인>이 될지를 결정하십시오

<증인>이 될지 <주인>이 될지를 결정하십시오

 

 

 

 

 

 

<증인> 될지 <주인> 될지를 결정하십시오(26:1-16)

 

수차례 바울이 심문을 받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총독에게 왕에게 그대로 유대의 대표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바울이 변론을 합니다.

오직 한가지입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입니다.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바울이 만난 사람은 시장, 총리, 대통령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것은 그의 생각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 만난 예수를 말했습니다.

그런 엄청난 사람을 세상의 높은 자격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으로 만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세상의 자격으로 만나려면 시장이고 총리고 대통령을 언제 만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죄인의 자격으로 살도록 하십니다.

그래야 만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크고 높은 사람이 되여야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작고 초라해야 만나는 사람들이 있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을 만나도록 우리에게 이런 부족함을 허락하십니다.

 

내가 아파야 보이는 사람이 있고 내가 부족해야 만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만나고 해야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높아지고 커져서 만나는 사람을 소명으로 삼습니다.

아닙니다. 높아지고 사람이 되어서 만나는 사람만 소명이 아니라 작아지고 낮아지고 죄인으로서야 만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일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보면 바울은 크고 높아져 대제사장과 총리와 왕을 만날 자격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자격으로 말한다고, 그들의 세상적 가치관 안에서 말한다고 그들이 복음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이미 세상의 방법과 가치관으로 물든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그분의 뜻을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절대로 사람은 이해할 없는 방법으로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데 중에 가장 것이 한가지는 바로

<이성> <경험>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적적으로 접근합니다.

이성의 끝은 바로 철학입니다. 학문입니다.

우리는 철학과 학문적 접근이 최고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논리와 학문적 접근을 선택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가 했던 모든 것을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이 왕과 총리 앞에서 말하는 것은 이성과 철학과 학문적 접근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입니다.

바로 그가 만난 예수입니다.

<아는 예수> 아니라 <만난 예수>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전한 것이 그의 학문과 이성이 아닙니다.

그냥 그가 만난 예수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예수님이 우리를 두가지 신분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는 <>이고

하나는 <증인>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증인은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주인처럼 사는 사람이 인기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 주인이 되어 꿈을 가지고 노력해서 세상에서 으뜸이 되어 보라고 자기 인생을 성공해 보라고합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위대한 바울을 부를 종으로 불렀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주인적 삶과 하나님의 종의 삶은 접근 방식부터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한다는 것에 감사해야하지만 종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물질과 삶의 주도권은 주님입니다.

모든 것을 종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은 종이 되어야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서는 여전히 주를 만나기 전의 모세이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입니다.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세상적 학문의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 부르실 종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과 이성의 끝은 내가 주인입니다.

이성적이고 철학적이며 학문적 접근의 끝은 주인 삼는 것입니다. 주인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접근하면 내가 빛이 나지 주님이 빛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빛내는 사람이지 내가 빛이 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하면 사람 설교를 잘한다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면 설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설교는 주님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종이 됩니까?

진짜 주인을 만나야 종이 됩니다.

주인을 정말 만나지 않으니까 종이라고 말은 하는데 주인처럼 살아갑니다.

 

주인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종이 것만도 감사하게 살게 됩니다.

주인은 세상의 왕이고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너무 엄청나서 앞에서는 마른 막대기 만도 못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분이 나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만으로도 감격이고 기쁨이고 송구한 마음에 그거 드릴 것이 눈물밖에 없음을 만나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눈물입니다.

종으로 사는 것도 감사의 눈물입니다.

오직 예수를 <만난> 사람만 알게 되는 눈물입니다.

 

 

종이 일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둘째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가장 위대한 삶은 하나님이 한일과 내가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보지도 경험하지도 않은 일을 마치 있는 것처럼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이성적 접근입니다.

가장 철학과 이성적 접근이 문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증인의 본연의 임무는 것을 말해야 하나님이 드러 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일과 하나님이 나타난 일에 증인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일과 나타난 일이 아니라 머리속에서 나오며 내가 생각해낸, 누가 그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말했고 사람이 저렇게 말했고를 너무 많이 말합니다.

우리의 설교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 내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저렇게 말했습니다를 말합니다.

철학과 이성의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사람은 일과 경험한 일을 말해도 학문으로 접근합니다.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유대의 총독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올라가는 최고의 자리가 총독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듣는 모든 것을 학문으로 들립니다.

이성으로 들립니다. 철학으로 들립니다.

 

바울은 <증인>으로 살고 세상은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주인과 증인의 차이는 오직 만남입니다.

주를 만난 사람은 증인이 되고

주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주인이 됩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주인으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9-12)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증인으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19-23)

 

그것이 만난 이전과 이후의 삶의 가장 변화입니다.

내가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나쁜 습관을 끊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나를 증언할 것인지 그렇게 끊게 하신 하나님을 증언할 것인지를 결정해야합니다.

 

예수를 믿고 더더욱 자기를 증언하는 사람이 수도 있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주인과 종으로서 사는 삶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을> 증언하는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배운 학문을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학문이 문제가 아닙니다.

학문이 증인이 되려는 도구가 되어야지 학문자체가 증언의 주체가 되지 않게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설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는 그에게 유익하던 것을 이제는 해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해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게 유익했던 것들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으로 유익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종으로 살려니 그것이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살면 유익한데 종으로, 증인으로 살때는 해가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증인이 되어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인과 증인의 유일한 차이는 오직

<만난 예수>입니다.

 

바울과 모세의 이전 삶과 이후 삶의 유일한 차이는 오직

<만난> 하나님,

<만난> 예수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시작은 오순절 성령을

<만난> 후입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누구나 있고

누구나 있고

어린 아이도 있는 삶입니다.

 

<복음>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 중에 <> 빼면 복이 됩니다.

음을 빼고 복만 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소리인 <> 빼고 사람들이 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복음 중에 음이 빠진 복만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리인 음을 넣으라고 말합니다.

<> <> 합해야 그것이 종으로 사는 증인이 됩니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그리고 내가 들은 하나님을 증언 하는 일입니다.

 

주인으로 살면 삶이 복잡하지만

종으로 살면 단순합니다.

 

세상이 악해 질수록

우리를 복잡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삶은 단순하고 명쾌하고 쉽습니다.

내가 인생의 전부를 만드는 주인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이루시고 말씀하신 것을 전하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인생을 위대하게 만들 자신이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만난 하나님이 있습니다.

삶에 이루신 그분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것만 증언하는 종이되는 !

가장 위대한 삶의 일입니다.

 

 

 * 김태형목사입니다.

복음을 위해 종으로 살아가는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

자랑스런 사람들입니다.

어제 가덕도를 방문했습니다. 나를 귀하여 여겨주는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 종으로, 증인으로 살아내는 것에 일등이 되면 좋겠습니다.

자랑스런 나의 친구들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