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심과 사명(행23:1-10)
같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방향이 다 다릅니다. 색깔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몇 종류로 나뉩니다. 그런데 그 방향과 색깔의 울타리가 무엇이냐에 따라 전부 달라지게 됩니다.
첫째, 양심을 따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1)
양심이 그 사람의 울타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바를 양심을 따라 믿었다고 합니다.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신앙의 기초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의 색깔은 전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의 삶의 모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양심에 기초를 두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양심이 신앙의 기초가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믿는 양심이 모든 삶과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의 기본은 양심을 따라 행동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양심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자리가 높아지고 예수 믿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사람들로부터 더 욕을 먹게 됩니다.
마음의 양심을 따라서만 살아도 괜찮은 신앙이 되는데 그것도 안합니다.
바울은 지금껏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세상에서 욕을 먹는 이유는 양심도 없어서입니다. 세상의 최고의 기준은 도덕과 양심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할 말은 다른 것은 다 두고라도 양심대로 믿고 살았다고 말할 수는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양심도 없는 사람이 세상에는 아니 교회 안에는 많습니다.
악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다니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면서도, 양심적으로 그렇게 살면 안되는데 얼굴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신앙의 변명을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반론합니다.
양심은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세상에 할 말이라도 있습니다.
둘째, 율법대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3)
율법이 그 사람의 울타리입니다.
"23: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아무리 믿어도 그 사람의 울타리는 율법입니다. 모든 것이 율법이 목표이고 율법이 울타리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어기는데 함정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율법을 목표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 내야 잘 사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율법의 잣대로 기준을 정하고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도 율법을 어기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이 울타리가 되고 율법이 최고의 목표가 되는 삶은 결국 사람을 심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면 결국 다른 사람을 치는 인생이 됩니다.
셋째, 조상적부터의 신앙의 관습과 유전이 울타리가 되는 사람입니다. (6)
"23: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이 사람은 전통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울타리와 한계는 조상적부터의 관습과 유전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런 부류의 사람의 울타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가진 전통, 조상적부터 물려받은 유전이 최고의 울타리가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사람의 마지막은 다툼이 됩니다.
"23: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어떤 새로운 역사를 만드시려고 하는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내가 지금까지 조상적부터 들어오고 조상들이 가졌던 유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늘 다툼이 많고 사람이 나누어지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다툼이 많고 자꾸 사람들과 나뉘는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믿어오던 전통과 관습 안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합니다.
진리는 자유함입니다. 진리는 다툼과 나뉨이 아니라 자유함과 하나됨입니다.
넷째,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11)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참 인생의 시작은 사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사심을 따라 사는 인생이 있고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까지 우리는 사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내 마음,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인생이면 사심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 삶을 드려 이루려는 인생은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부르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물질도, 시간도, 인생도 이 사명에 전부를 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명 만큼 큰 위험이 있다. 사명만큼 큰 반대가 있다. (10)
"23: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반대를 이기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입니다. 나의 힘이 아닙니다.
나를 안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가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사명을 주심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한계를 넘게 하십니다.
사명이 생명을 살리고 사명이 인생의 한계의 울타리를 넘게 하십니다.
바울을 이끈 것은 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사명,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이루려하는 것을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울타리고 삼고 목표로 삼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은 주의 일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증언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까지 가게됩니다.
지금 당한 어려움과 한계를 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울타리에 매여 사는 사람들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바꾸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붙들고 따라가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다 바꾸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간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이루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각자의 사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완성해 가십니다.
어려울 수록 사명을 향해야합니다. 어려울 수록 각 사람의 울타리에 매여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어려울 때 사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가장 바른 길입니다.
어려울 때 아픔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묵상할 수 있기를 다시 기도합니다.
사람은 각자의 목표와 울타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최고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나의 울타리와 신앙의 베이스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툼이 생기고 판단하고 갈등이 생깁니다. 나의 목표가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의 부르심이 최고가 되야합니다.
그것이 모든 갈등과 아픔과 문제를 푸는 유일한 답입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한 것은 바울의 탁월함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일을 증언하려는 마음과 하나님의 사명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사심과 사명이 명확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사심의 끝은 망하지만 사명의 끝은 영광입니다.
- 안식년을 나왔습니다. 일정을 삼개월 연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유익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심이 아니라 사명을 따르면 가장 아름다운 길을 주십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덕분에 은빈이가 혼자 보내게 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이번 시간을 통해 은빈이가 훌쩍 자라게 될 것 같습니다. 기도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