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행20:1 -38)
사명에는 그냥 나의 확신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반드시 확증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오늘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사명을 위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환난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고백을 하고 이런 각오를 할까요?
그냥 사명만 받아서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기전에 삶의 현장, 말씀을 따르는 현장에서 놀라운 영적인 체험들을 했습니다.
그 영적 경험들, 즉 말씀의 열매들을 통해 성령의 마음에 확증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사명만 찾아다닙니다.
사명을 받으려합니다.
그 사명 받으려다 평생을 허비합니다.
사명이 없어서 사명을 따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명의 열매를 보지 못해서 사명을 따르지 못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명은 누구나 다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세우는 사명 즉 천국 열쇠를 받았습니다.
양을 치고 돌보는 사명입니다. 초대교회를 이끄는 사명입니다.
바울은 임금과 이방에 복음을 증거하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성공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바울의 사명은 증거입니다.
그리고 목숨이 위태로운 일에 전부를 겁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하면 작은,
지내온 세월동안 증거하면서 얻은 마음의 확신,
이길이 맞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체험,
영적인 충족감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 체험들이 바울로 하여금 사명의 확증으로 찾아옵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어느날 갑자기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명은 날마다 조금씩 얻는 영적 충족감에서 얻어집니다.
바울은 몇 년의 시간동안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증거하고 말씀을 전파하면서 하나님의 영적 체험,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신다는 영적인 체험을 수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자신에게 찾아온 사명, 임금과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그릇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증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드리는 마지막 순간의 헌신을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어느날 갑자기 큰 것으로 여깁니다.
어느날 내가 귀하게 놀랍게 사용되어지는 것을 꿈꿉니다.
아닙니다.
사명은 날마다 주어지는 확증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날마다 하는 일을 통해 내 마음에 확증되는 것으로 찾아옵니다.
사명은 날마다의 일상입니다.
날마다 내가 누리는 영적 기쁨,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영적 충만으로 인도되는 것이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의 죽음을 건 사명은,
로마도 보아야한다는 사명은 어제의 결과입니다.
어제 경험한 일상의 체험이 오늘의 로마를 향한 사명을 확증하게 하고
어제의 영적 행복이 오늘의 헌신으로 인도합니다.
어제 행복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헌신하는 떨어짐의 자리,
꽃의 떨어짐의 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열매는 과거의 찬란한 햇빛을 받은 나무가 꽃을 떨어뜨리는 헌신을 하게 됩니다.
어제는 영적 기쁨의 길이 오늘의 마지막 사명의 확증으로 나아갑니다.
아무것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제는 중요합니다.
오늘은 어제의 얼굴이고 내일은 오늘의 꽃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어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어제가 결국 내일을 열매 맺습니다.
어제의 아픔이 내일의 햇빛을 만들고
어제의 햇빛이 내일의 열매를 만듭니다.
사도바울의 헌신은 어제의 사명의 부르심에 오늘의 확신을 더한 내일의 여행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일을 기대합니다.
어제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기대합니다.
어제 살리셨고 고치셨고 인도하셨던 그 말씀이 내일도 그렇게 인도하실줄 믿는 것입니다.
어제를 잘 살지 못한 사람은 오늘도 자신이 없습니다.
어제를 잘 이기지 못한 사람은 오늘도 회의속에 살아갑니다.
어제를 찬란한 햇빛을 맞지 못한 사람은 내일의 열매를 기대할 소망이 없습니다.
찬란한 햇빛은 좋은 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풍성을 말합니다.
매를 맞아도, 고난을 당해도, 굶어도, 아파도 그 가운데 내 맘에 찾아오신 성령의 평안과 사람을 세우며 말씀이 역사하고 힘있게 증거되는 현장을 가진 것입니다.
나를 능가하고 나를 이끌었던 말씀의 감격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을 이기는 내일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그냥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의 흥왕하는 현장을 본 사람입니다.
그 말씀의 역사를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를 증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역사한 현장을 증거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증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증인의 삶은 첫째, 눈물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19)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께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증인은 눈물의 삶이 있습니다. 영혼을 위하여 눈물 흘리는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본 사람, 증인은 이미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기준인지 압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이 사라진 세상입니다.
눈물이 사라진 증인입니다. 모든 증인이 능력만 구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증거는 오직 능력입니다.
그러나 참 목자, 참 증인의 증거는 눈물입니다.
눈물로 증인의 삶을 알 수 있습니다.
증인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
교회는 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 몸은 몸이 아닙니다. 그냥 육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피로, 생명으로 세워졌습니다.
생명은 마음입니다.
교회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바울의 증인의 삶에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있습니다.
증인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마음의 전달입니다.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음입니다.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머리가 아닙니다. 영혼을 올리고 마음을 울리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는 곳에는 마음의 감동과 영혼의 감동 즉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증인에게 다른 것이 다 있어도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면 증인이 아닙니다.
그냥 장사꾼입니다.
요즘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가지고 장사를 합니다.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지식의 전달 장소는 장사하는 곳입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은 영혼을 울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건을 거래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생명입니다.
생명으로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마음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돌?이라는 것은 장사하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 전달 되어야 생명이 자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생명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없이 간다면 그곳은 장사하는 곳입니다.
마음없이 드리는 예배,
마음 없이 드리는 찬양,
마음 없이 드리는 헌금,
마음 없이 사는 사명은 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다른 것은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두 렙돈을 넣어도 하나님은 마음을 아시고 아무리 많이 넣어도 하나님은 마음 없음을 아십니다.
가장 싫은 선물은 마음 없이 받는 선물이며
가장 싫은 말은 입에 발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회복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증인이 가져야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셋째, 모범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35)
왜 모범이 필요한가하면 멀리 있는 사람은 모범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을 따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를 믿고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믿게하는 것만 목적을 가집니다.
그래서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닙니다.
교회를 나오게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르게 할 자들은 가까운 자들입니다.
가까운 자들에게 모범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약함은 모범입니다.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함께 따름을 강조합니다.
어제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오늘을 낳았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고 내일을 생각합니다.
어제는 결국 내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증인의 삶이 아쉽습니다.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눈물입니다.
영혼을 부여잡고 눈물 흘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줄 삶의 모델입니다.
모델을 찾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몇 없는 사람들로 온 세상을 따르게 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게 하는 일에 전부를 걸어야합니다.
믿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장 어려운 모범인 <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35)
주지 않고 받으려합니다.
나누지 않고 거두려합니다.
복은 주는 것입니다.
이런 모범을 시간이 갈 수록 찾기 어려워짐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증인의 삶의 핵심은 주는 것입니다.
눈물은 나의 눈물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주는 것이며
나의 삶을 주는 것입니다.
주지 않고 받으려 하고 나누지 않고 잡으려 하니 세상이 우리에게 등을 돌립니다.
오늘을 어제로 만들고
어제를 내일로 만들어야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떠났던 세상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 천준혁선교사님 부모님입니다.
세 자녀를 모두 선교사로 바친 귀한 분들입니다.
어머니는 한쪽 폐가 없으시고 아버님은 그 어머니를 평생 수발해오셨습니다.
병이 들고 아프지만 자녀를 모두 하나님께 드린, 세상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린 귀한 증인들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직 드릴 것이 있고 나눌 것이 있고 바칠 것이 있습니다.
이 부모님은 참 증인의 삶을 사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용사십니다.
한국을 나올 때 마다 찾아 뵙는 이유는 스스로를 위한 다짐의 시간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축복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