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들고 가십니까 붙들려 가십니까? (행18:4- 11)
붙잡고 가십니까 아니면 붙잡혀서 가십니까?
우리가 붙잡고 가면 잘 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잡으면 그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진짜는 붙잡는 것이 아니라 붙잡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잡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사랑은 내가 그 사람에게 붙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붙잡지 않고 붙잡혔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5)
이 붙잡혀는 죄수가 붙잡힌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은 죄수로 붙잡힌 것과 같이 말씀에 붙잡힌 상태가 되어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이끌림을 받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가는 상태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은것처럼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세상의 관점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열매를 맺고,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노력을 하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깊음은 내가 잡는 것이 아니라 붙들림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그분으로 사는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잡고 가는 삶이 문제가 있는 것은 내가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내가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붙들려 사는 것,
이끌려 사는 것은 성령안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우리의 참 시작은 이끌려 온 인생입니다.
그것이 인간, 사람입니다.
사람의 참 가치는 내가 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목적에 이끌리고 붙들려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들려 살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에덴 동산에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사단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문제가 되는 순간은
이끌림 받은 것에서 스스로 자유로와 지고 싶은 욕망에 잡히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이끌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지만
내가 바라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이끌림,
말씀의 이끄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 참 자유와 기쁨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있습니까 아니면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까?
붙들려야합니다.
이끌려야합니다.
붙들림 속에 사명이 있고
이끄심 속에 영광이 있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삶은 한마디로 내가 주인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채우심이 없고
스스로 채워야하는 노동형 인간의 아픔만 남습니다.
우리 인생의 시작은 이끄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존재 시작이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이끄신 목적을 그렇게 말합니다.
" ~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며…"(창2:15)
하나님의 이끄심은 늘 목적이 있습니다.
붙들림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끄심 안에 거하지 않고 붙들리지 않으면 늘 목적은 나가 됩니다.
존재의 목적은 나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붙들리게 하시고 이끄심 안에 우리를 거하게 하십니다.
사람을 만나도
일을 해도 이끄심 안에 거해야합니다.
그럼 누가 이끄심, 붙들림 안에 거하게 됩니까?
첫째,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만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용한 사람들,
말씀에 붙들리고 성령에 붙들린 사람의 특징은 내가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아가,
나의 존재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붙들리지 못합니다.
내가 사는 사람은 내가 아직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자신의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상처를 남기고 가는 곳 마다의 나를 남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 나를 전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보혈과 그리스도의 용서로 나의 옛 사람이 죽은 사람만 그렇게 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나의 옛 자아,
나의 죄된 옛 사람이 죽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죽지 않은 곳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복음이 복음되지 못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지 않은 사람은 복음은 거치는 것이 되고
복음은 불편한 것이 되고
복음은 나의 길을 막는 것이 됩니다.
말씀에 붙들리고 성령에 매임바 된 사람은 십자가에 완전한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과정을 지난 사람만이 붙들린 사람이 됩니다.
붙들리면 하나님의 영광이나 내가 붙들면 나의 영광입니다.
둘째, 나의 자격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격으로 살아갑니다.
자격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매임바된 시작입니다.
우리는 늘 그렇습니다.
내가 이정도면 자격 있다 생각합니다.
내가 이 정도면 이 일을 할 수준이 된다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시작은 흙입니다.
흙이 하나님이 되려했습니다.
흙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격이 있다 여기는 순간
흙으로 바벨탑을 쌓고
흙으로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려하고
흙으로 토기장이를 향하여 자격을 찾습니다.
자격없는 토기로 사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매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은 철저히 자신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격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과 삶의 이유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역은 쉽고 짐은 가벼웠습니다.
매이지 않으면 무겁고
붙들리지 않으면 힘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면 늘 무겁고 힘듭니다.
바울은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일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붙들린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내가 자격 있다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 뭘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느냐 아니하느냐입니다.
자격의 얼굴은 판단입니다.
우리는 자격없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자격 있는 사람처럼 판단합니다.
나 자신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삶을 판단합니다.
다 자격 없음을 잊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자격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 자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격 말고 다른 모든 자격으로 살아갑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말고 다른 모든 것을 다합니다.
판단하고 시기하고 불평하고 미워하고 계산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
유일하게 허락된 복음을 전하는 권위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참 능력은 복음을 전하는 삶의 현장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전하는 것 말고 우리는 다 하려합니다.
자격을 구하고 자격을 찾습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 자격입니다.
그 외의 모든 자격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는 자격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사용할 자격은 판단하고 계산할 자격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자격입니다.
나의 인생을 판단할 자격도 나에게 없습니다.
그냥 복음을 전할 자격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자리를 침범하면 눈물이 찾아옵니다.
자리를 넘보면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한 자격!
복음을 전할 자격입니다.
이끄심 안에 거하십시오.
말씀에 붙들리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는 비결입니다.
비록 세상에 매였지만 세상에 자유하는 길,
말씀과 복음에 매이는 것입니다.
* 김동훈강도사님이랑 정은사모님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아픔의 시간을 지나고 복음에 매임바되어 선교를 준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그 삶의 현장을 본다는 것은 설렘이고 기쁨이고 기대입니다.
늘 그렇지만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기대입니다.
이들이 참 기대되고 기대됩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