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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찢고

옷을 찢고

 

 

 

 

 

 

 

 

 

 

 

 

 

 

 

 

 옷을 찢고(14:11 - 19)

 

세상에서 길은 스스로 왕이 되든지 죽든지 중에 하나입니다.

세상은 이상합니다. 왕으로 세우든지 죽이든지 중에 하나입니다.

세상은 그것이 바른 길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왕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치고 나니

바나바는 제우스라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신격화 합니다.

그리고 신당에서 황소와 화관으로 사람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내려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당신은 왕이 되어야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왕이 되어야합니다.

 

 

세상의 역사는 왕의 역사입니다.

누가 우리를 다르실 것인가가 세상의 관심입니다.

우리를 다스려줄 세상의 신이 필요한 곳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뭔가 뛰어나면 삼으려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리에 앉게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전략입니다.

조금만 뛰어나면 세상에 자리에 앉히고

조금만 뛰어나면 세상에서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기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입니다.

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전능함을 증명해 보이려고 살아갑니다.

열심히 살고 남들이 이루지 못한 놀라움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의 소망의 유일함입니다.

그래서 죽을 고생을 다해 뜻을 이루고 나면 사람은

아니 세상은 마지막 시험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당신이 왕이 되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전능함을 세상에 보였으니 당신을 우리가 섬겨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내가 자리에 앉아있고

사람들의 섬김과 대접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무조건 싫고

나를 대접하고 아부하고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은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자리에 앉는 순간

불현듯 찾아옵니다.

우러러 보는 자리,

사람들이 섬기는 자리에 앉으면 왕으로 섬기는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자신을 완전히 죽이지 않으면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유혹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기다립니다.

황소도 준비합니다.

황소는 섬김의 물질입니다.

화환은 칭송의 물질입니다.

 

 

사람들이 섬기고 칭송하는 것으로 우리를 왕으로 대접합니다.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뭔가 자신이 섬길 대상을 찾고

사람들은 뭔가 전능함에 빠져 들고 싶어합니다.

 

 

마침 바나바와 사울이 걷지 못하는 자를 고침으로 전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신격화합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13)

 

 

이때부터는 정말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자리를 내려가지 않으면

정말 하나님처럼 살게 됩니다.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고 좋은 소리 좋은 말에 정신을 못차립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임을 압니다.

 

그것이 가장 악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자신의 겉옷을 찢으며 일을 못하게 말립니다.

겉옷을 찢었다는 말은 자신의 전부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겉옷은 가장 가치 있는 자신의 신분을 의미합니다.

옷을 찢고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이상한 것은 왕의 자리를 사람들이 높이려할 자리에 서면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냥 왕이 되고 섬김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 죽을 일이 기다립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19)

 

왕의 자리를 박차고 나오니 세상은 사람을 죽이려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왕으로 세워서 죽이든지

왕이 되지 않으면 돌로 죽이든지 합니다.

 

 

결국 세상의 목적은 왕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되어 하나님께 죽든지

왕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 삶으로 세상의 돌에 맞아 죽든지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우 살아서 안디옥으로 돌아온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려면 세상에서 죽을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2)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려면 죽을 고생,

많은 환난을 겪어야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복이 있다 믿으십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세상에서 형통하다 믿으십니까?

 

 

세상은 그렇게 자꾸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래서 아픔이 생기고

눈물이 생기고

힘듦이 생기면 자꾸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고 믿도록합니다.

믿음이 사라지도록 만듭니다.

 

 

예수를 믿을 수록 세상에서 환난을 많이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평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핍박이고 환난이고 고난이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평안이 나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 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사람의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정말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지지만

목회자와 선교사의 피와 눈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환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남들 알지 못하는 가슴 앓이를 죽도록 하는 것입니다.

 

 

 

더더욱 왕이 되지 않고

섬김의 자리,

낮은 자리에 앉으려 수록 세상은 우리를 죽이려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왕의 자리에 앉혀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도록합니다.

 

 

그래서 왕이 되게 해서 하나님 손에 죽게하든지

낮은 자리에서 세상에 밟혀 죽든지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전에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믿음의 자리에 선후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증인으로서 세상에서 돌에 맞는 자리에 서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옷을 찢고

자신의 전부가 찢겨도 하나님의 자리에는 앉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에 싸워야 자리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자리의 싸움 앞까지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살아서 서고 싶은 마지막은 전능함입니다.

자신의 전능함을 세상에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리에 서면 결국 왕의 자리에 서느냐 종의 자리에 서느냐의

<자리의 싸움> 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영광의 싸움이라고 풀었습니다.

 

 

사람의 존재는 전능함을 입증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전능함이 입증되면 어김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합니다.

자리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신을 벗어야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 이유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리를 목숨과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의 사람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그런 기회가 오면 단번에 잡아버립니다.

전능함을 임증하고 내가 세상의 왕자리에 앉는 기회.

기회를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결정해야합니다.

왕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지

종이 되어 세상의 돌에 맞을지!

 

 

세상에서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오직 개의 자리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어느 자리에 계십니까?

왕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종의 자리입니까?

 

 

당신이 (신분과 가짐) 찢은 기억이 없다면

당신은 여김 없이 왕의 자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해야합니다.

그리고 옷을 찢는 과정을 지나야합니다.

 

 

과정을 지나는 것이 모세의 광야 40년이고

요셉의 13년이며

베드로의 3년이고

사도 바울의 멀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우리에게 3, 3, 13, 40년으로 찾아옵니다.

 

 

저는 지금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시간임을 알고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옷을 찢지 않으면 나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옷을 찌는 시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찢음 없는 세상의 모든 자리는 결국 변기와 같은 자리입니다.

배설물과 같이 여긴 바울의 마음을 우리를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옷을 찢는 과정없이 앉아 있는 모든 자리가 결국

화장실의 변기에서 앉는 것과 같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자리가 귀할 있는 것은 종으로서 앉은 종의 자리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