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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한 일, 우리가 할 일

하나님이 한 일, 우리가 할 일

 

 

 

 

 

 

 

 

 

 

 

 

 

 

 

하나님이 , 우리가 (13:13 -52)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은 질투입니다.

사람은 진리냐 아니냐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되느냐 나보다 못하느냐가 우리의 감정을 결정합니다.

아무리 좋아도 나보다 잘하면 미운 것입니다.

 

 

죄의 색깔은 질투로 나타납니다. 죄의 모양은 시기에서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비방하고 반박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진리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둠이 드러나면 회개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아니라 회개의 반대인 질투와 시기과 비방과 반박으로 드러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루러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한 것은 한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시고 죽음 가운데 부활하신 하나님의 일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의 죄악을 말하고

사람들의 악을 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죽게 했지만

부활케하셨던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결국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스라엘과 이방을 위한 사함의 복음입니다.

예수 믿고 죄를 사해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는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 하지 못하는 인생은 결국 망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죄의 결과인 죽음을 해결하시고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와 함께 한다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이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국 내가 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축복에 중점을 가지고 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중요하지 않고 아직 내가 중요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의 중간 지점인 축복을 다리로 삼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고 미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사함을 받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죄가 인정되지 않는 복음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결국 바나바와 바울을 쫓아내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50)

 

 

어떤 사람이 죄를 인정하기 싫어할까요?

 

첫째, 나보다 남이 되는 것이 싫은 사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싫어한 사람은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에게 집중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랬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44-45)

 

 

자신에게 집중하던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집중함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무리나 인기나 자리에 연연하던 인생은 무조건 그들이 싫은 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뭔가를 못해서 싫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니 싫은 것입니다.

죄의 시작은 자기의 높아짐입니다.

그것이 인간 죄의 본질이기에 사람들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면

그냥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적은 같은 직종의 사람입니다.

목사의 적은 목사가 되고

장로의 적은 장로가 됩니다.

선교사의 적은 선교사가 됩니다.

 

자기에게 오던 인기,

자기가 최고인데 자기보다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냥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런 욕심과 질투와 시기 안에 갇힌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은 인생의 기준은 얼마나 높으냐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모이느냐

얼마나 잘하느냐입니다.

 

그래서 못하는 사람,

못나 보이는 사람,
없어 보이는 사람과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

나가는 사람,

이름 있는 사람과 친분을 맺으려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아는 것이 인생의 능력이고

자신의 힘이고

자신의 위치라고 믿습니다.

 

 

믿음의 근거가 다른 사람입니다.

믿음의 근거가 자신의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함께라는 것은 그들의 사전에 그런 단어는 없습니다.

물론 함께는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나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른 함께를 선택합니다.

 

 

둘째, 포기 것이 많으면 싫습니다.

 

 

버려야 것이 많으면 이런 바울과 바나바 같이 바른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 싫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지역에서 유력자들, 귀부인들, 자칭 경건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50)

 

 

뭔가 포기 것이 많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의 주어도 자신의 것을 포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위치나 권력이나 인기나 자리가 높은 사람은

바른 말을 전하면 싫어합니다.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가지는 것이 최고인줄 알고 살아온 사람은 바르게 전하는 말씀이 싫습니다.

왜냐하면 것을 놓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인생이 끝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옳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하나님이 하실 일도 자신의 인생이 답이 되지 못합니다.

이유는 자신이 답이었고

자신의 생각이 진리였고

자신의 경험이 최고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위해 살아온 인생은 죄를 회개하라고 말하면

내가 잘못했느냐고 되묻습니다.

못한 것이 없다고 정말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정말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운데 있어서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바꾸어야 생명이 있다고 해도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생각과 삶이 정답입니다.

 

 

셋째,  특권의식이 있으면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한 곳은 회당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중에 믿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칭 정통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45)

 

 

그런데 기뻐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48)

 

 

 

내가 자격 없음으로 시작되었음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특권의식을 가지는 순간 우리에게 죄가 찾아옵니다.

죄는 특권의식,

특별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아담의 범죄는 내가 하나님이 되도 되겠다는 특별의식에서 찾아왔습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니 자기가 세상에 왕이 되도 되겠다 여겼습니다.

자격이 있다 여겼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시작됩니다.

신앙은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를 믿던 사람이,

내가 인생을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절망입니다.

아픔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는 결코 없는 인생의 광야를 허락하십니다.

 

광야는 나를 보던 사람이 하나님을 보는 사람으로 체질이 변화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2 자궁입니다.

새로운 믿음을 잉태하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생명의 장소입니다.

 

 

특권의식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절망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하셨던 방법이 바로 절망입니다.

인생을 의지 하지 못하게 하고

인생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 절망입니다.

 

 

그러나 절망이 영원한 절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봐야 하는 순간에 끝까지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광야이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건

자신을 보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이 달린 장대의 놋뱀을 보듯

하나님을 보는 시선이 회복될 절망의 무덤에서

희망의 꽃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결국 우리가 일을 말씀합니다.

 

"믿는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은 믿는 것입니다.

믿는 말고 다른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믿고 기뻐합니다.

 

 

그들이 것은 말씀을 믿은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것은 같이 믿는 것인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

자신의 지식,

자신의 자리를 믿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과 물질을 믿었습니다.

 

 

말씀을 전한 결과는 오직 믿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믿던 것이 가짜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보다 믿을 것이 나에게 남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있고

내가 믿을 것이 있으면 결코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믿을 것을 없애버리심으로 우리를 믿게하십니다.

 

유대인은 자신의 선택함을 받은 민족성을 믿었고

이방인은 민족성이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믿을 것이 있으면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자신이 믿던 눈이라는

자신의 모든 능력이 지나가는 길인 <>이라는 것을 잃고 나면

그때야 보이지 않던 자신의 죄가 보이고

보이지 않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여전히 나는 내가 믿을 것을 찾고

내가 붙들 것을 세상에서 찾는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믿는 믿음도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

그것이 모든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

 

 

 

믿음!

그냥 은혜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