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능이 언제 나타납니까? (행13:4 - 12 )
늘 능력을 달라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늘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성령의 권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현장으로 가면 됩니다.
바울이 바나바를 통하여 안디옥에서 사역을 할 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의 구별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사역의 현장에 들어가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이 시작 되었는데 바보라는 곳입니다.
그곳에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인 바예수를 만나는데 그는 바울 일행을 괴롭힙니다.
복음을 전하자 총독이 예수 믿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단호합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자 봐주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보지 못하게합니다.
맹인이 되어 인도할 사람을 찾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저는 의아합니다.
사람을 용서해야하지 않는가?
사람을 기다려줘야하지 않는가하는 의문입니다.
아무리 거짓 선지자여도 복음으로 권하고 기다리고 인내해야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성령은 그것을 그렇게 풀지 않습니다.
마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는것처럼 성령의 가고자 하는 방향에 걸림이 되면
바로 즉결 심판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보지 못하게 합니다.
아마 이 시간을 지나면서 바예수가 마을을 돌이켰는지 모릅니다.
성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죄에 대하여
거룩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문제가 생기면 심판 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것은 다 용서하십니다.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에 걸림이 되면 가차없이 버립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성령은 방향을 가지고 간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방향에 걸림이 되면 무섭게 진노하십니다.
바예수라는 마술사는 총독에게 전도하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대적하여
총독이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큰 문제입니다.
바울의 첫번째 이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11)
사람의 눈을 뜨게 해도 시원찮을텐데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이상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바보섬 총독 서기오 바울은 거짓 선지자 바예수가 눈이 멀자 그것을 보고 또 예수를 믿습니다.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12)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의 방향에 걸림이 되는 사람은 때로 아픔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사람을 살리는 아픔으로 사용하십니다.
저는 그 바예수가 영원히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사울처럼 보지 못하는 시간을 통하여 주를 만나는 기회로
하나님은 사용하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사람이 세워지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 같이,
성령의 일하심 같이 징계와 복음이 같이 전해 질 때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에 걸림이 되는 사울을 사랑하시지만
그에게 보지 못하는 아픔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에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영원한 아픔이 아니기에 감사입니다.
아픔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원한 아픔>과 <일시적 아픔>입니다.
영원한 아픔은 완전히 하나님께 버려지는 아픔이요
일시적 아픔은 영원한 회복을 위한 일시적 아픔입니다.
바울은 알았을 것입니다.
바예수가 뭔가를 몰라서 그렇다는 것을...
바예수를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생각했고
그래서 바예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예수에게는 기회이고
성령은 그 아픔을 총독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을 믿는 기회로 삼습니다.
초대교회가 생긴 이후,
성령이 임한 교회는
성령이 주도하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주도는 늘 복음의 확장성과 같이 갑니다.
그래서 성령의 주도성은 사람을 보내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예수 믿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성령이 늘 그렇게 일하시지만
성령이 때로 아픔을 주시는 경우는 성령의 확장성,
성령의 방향성에 걸림이 되는 사람에게는 살리는 능력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죽이는 능력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사단의 방해와 훼방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여서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죽여서라도 세상 땅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과 뜨거움을 사람이 막지 못합니다.
아니 막으려하고 게을러서 함께 가지 못하면
변함없이 하나님은 잔을 옮기십니다.
일곱 촛대를 옮기십니다.
특별히 성령의 보냄심 가운데 있는 사람과 같이 가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냥 그들이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불렀고>
성령이 <구별>했고
성령이 <보내>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4)
그래서 성령의 능력은 <보내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세우심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안되는 길로만 다닙니다.
요셉가 같은 사람입니다.
형들에게 팔리고 노예로 살고
주인의 부인에게 유혹을 당하고
감옥에 가고
감옥에 있는 사람을 섬기지만 잊어버림바 되고
그렇게 안되는 길로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보내심 중에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은혜가 있습니다.
바울의 길은 방해의 연속입니다.
대적하는 사람들의 연속입니다.
핍박과 아픔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은혜,
보내심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환경을 축복의 근거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축복은 핍박가운데 사람이 주께 돌아오느냐가 축복입니다.
축복은 아픔 가운데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축복은 나를 통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 모든 것도 아니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축복입니다.
바울은 처음으로 기적을 베풉니다.
그것도 사람을 회복하는 기적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합니까?
그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사용해야합니다.
복음이 걸림이 되는 방해거리를 제거하는데 사용해야합니다.
그래서 능력은 반드시 믿는자로 연결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능력을 잘못사용합니다.
우리는 능력을 나를 위해 사용합니다.
나의 이름을 내고
나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고 싶어합니다.
아닙니다.
능력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하나님의 복음이 확장 되는데 사용해야합니다.
그것이 참 능력,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은 언제나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복음의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귀신이 물러가고 아픈 자가 일어나는 기적은 늘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특히 시골로 들어갈수록 더 많이 그렇습니다.
시골에서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다보면
귀신이 나가는 일,
귀신을 쫓아 내는 일들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다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현장의 상실입니다.
복음의 회복은 현장의 회복입니다.
복음을 전하며,
성령의 방향성을 좇아 성령의 보내심을 따르면
늘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이 없으면
성령의 능력도 나타나지 못합니다.
성령은 늘 복음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보내심을 따르지 않아서이고
보내심을 따라 복음의 현장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을 전한적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한 것이 언제입니까?
늘 교훈적인 이야기
늘 잘 사는 이야기
늘 축복 받는 이야기만 전하고
참 복음인 예수가 그리스도인것과 죽으심과 부활을 언제 전하셨습니까?
성령의 능력은 그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그 현장의 상실,
우리 존재의 상실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과 함께 나를 드리고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나를 드릴 때 성령은 다시 능력으로 함께 하시며
사람들이 돌아오는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있을 것입니다.
몇 일전 베레나 교회에 일이 있어 갔었습니다.
성도들과 기도하고 잠시 마음을 나누는데
몇 명의 성도가 일년 전에 한 설교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설교를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그 말씀이 지금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고 전했습니다.
그때 전한 말씀이 바로 보지 못하는 자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가 예수님께 나와 고침을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마9장)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2. 한 종류는 눈으로만 보는 사람이고 한 종류는 영으로도 보는 사람입니다.
3.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육체적으로 보지 못하지만 그들은 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4. 육체적 눈과 영적인 눈이 있습니다.
5. 아픔이 영적인 눈을 뜨는 기회가 된다면 그것은 복음입니다.
6.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보지 못함이 그들에게 축복이었습니다.
7. 왜냐하면 보지 못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8 . 육체적 눈으로 잘 보는 사람이 복이고 좋은 것을 가지고 그 좋은것을 보며
좋은 것을 누리고 그것을 보는 것이 세상적으로 축복이나
9. 참 좋은 것인 예수님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10. 예수님은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입니다.
11. 여러분! 여러분은 비록 가난하지만, 육체적으로 병이 있고 아픔이 있지만
육체적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가진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참 생명입니다. 복음입니다. 길입니다.. "
그때 전했던 말씀의 요지입니다.
오늘 바예수에게 자꾸 마음이 갑니다.
거짓 선지자가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혹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해서 성령의 방향과 반대로 가는 것은 아닌지
자꾸 나의 이야기 같아 바예수가 마음이 쓰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고 자꾸 성령의 길과 반대로 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바예수가 자꾸 나의 이야기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
성령의 방향과 같이 가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보내시는 현장에 머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바예수가 잠깐 아픔을 가지지만 영원한 영적인 눈을 뜨고
참 행복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4,10구역이 그레이스펠로쉽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옷이며 신발이며 부엌살림 그리고 장난감까지 가져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상이 그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없는 축복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