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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와 <내가>

<불러>와 <내가>

 

 

 

 

 

 

 

 

 

 

 

 

 

<불러> <내가>(13:1 -3)

 

 

바나바가 아니고 바울인가?

세상은 자격을 찾습니다.  사람이 그런 자격이 되는가 하는 것을 찾습니다.

일을 감당할 자격,

일에 도덕적, 윤리적, 인격적, 그리고 학문적 자격을 찾습니다.

 

요즘 담임목사를 하려면 정말 힘들다고 합니다.

담임목사님 자리도 자리지만 자리에 들어가려면 엄청 힘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리 만족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는 학력도 나보다는 높아야하고

아는 것도 나보다 많아야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담임목사를 소개할 소개 거리가 있어야합니다.

어디 학교를 나오고

외국에서 공부를 했고 경력도 이런저런 경력이 있고라는 말을

본인의 입이 아니라 소개하는 자신,

내가 다니는 교회가 정도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담임목사를 소개하는 것을 핑계 삼아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도의 교회에 정도의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레벨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분이 얼마나 주를 사랑하고

그분이 주의 말씀에 얼마나 삶을 다해 섬기고

말씀과 삶이 일치가 되는지는 결코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소개하는 것은

분이 오셔서 교회 숫자가 이만큼 많아졌고

분의 경력이 이렇게 화려하고 하는 것을 소개합니다.

 

 

이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소개하는 나의 얼굴이 중요합니다.

나는 정도의 분과 함께 신앙생활하고

그래서 나의 수준은 정도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소개할 그분은 외국 어디서 공부했고

이정도의 화려한 일을 하셨고

지금 이만큼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관점으로 물든 우리의 세상접근 방법입니다.

오늘 성령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의 뜻을 위해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첫째 조건은 <내가 불러> 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시작의 소리는

<불러>입니다.

 

 

오늘 사람을 금식중에 성령께서 부르십니다.

바나바와 사울입니다.

 

 

사울은 우리가 아는바대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를 만나고

눈이 보이지 않는 과정을 지나는 기적을 통해 주님께 돌아옵니다.

과정에서 주님은 '사울아사울아' 하며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기록이 없으나 바나바도 성령을 통해 분명히 그런 부르심의 과정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에 해당하는 땅을 팔아 사도들의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사역하므로 사도들이 그에게 권위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의 삶의 헌신과 신앙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공통점은 오늘 다시 확증됩니다.

주님의 부르심,

성령의 부르심입니다.

 

 

개인적인 부르심은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적인 공동체를 통해 확증하는 시간입니다.

<불러> 과정을 지나야 진정한 보냄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께 보내주소서 내가 가겠나이다라고 헌신합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팔고 정리하고

아프리카든 어디든 가서 헌신하면 길이 열릴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모습이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주를 만나지 못한 모세입니다.

그렇게 사역하면 자기는 괜찮은데 함께한 사람 죽입니다.

 

 

주님의 <불러> 과정을 지나도 다듬어지지 못한 인격과

경험하지 못한 사역의 시간때문에 어려운데

주님이 불렀다고 내가 오늘 가겠습니다하고 가면 망합니다.

 

 

주님은 바나바가 개종자이지만 예루살렘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안디옥으로 파송을 받게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하고

그리고 오늘 성령으로 확증을 하십니다.

마치 모세를 부르시듯,

여호수아를 부르시듯 그렇게 공식적으로 부르십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부르심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람들과 교제하고

그리고 다소에서 기다리다 바나바를 통해 안디옥에서  일년을 사역합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공식적인 성령의 <불러> 확증을 받습니다.

 

우리는 자꾸 혼자 달려듭니다.

스스로 은혜를 받았으니 조건이 충분하다 믿고 주여 믿습니다하고

달려갑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주여 믿습니다하고 달려가면 꼬구라집니다.

자빠집니다.

교회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교회는 공동체가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기가 죽어야 세워지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결코 세워지지 못하고

세상적 열심으로 결코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습니다라는 개인적 체험의 확증만으로 세워지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철저히 공동체적이고 공적이며 공개적입니다.

교회는 내가 죽어야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런 교회를 나의 뜨거운 열심으로

나의 열정과 지식과 땀으로 세우겠다는 생각이

결국 교회를 망하게하는 장본인이 됩니다.

 

 

교회에서 없어야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은

<내가>입니다.

 

<불러> 반대는 <내가>입니다.

 

내가 확신을 받과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

내가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많이 헌신하고

내가 남들보다 많이 봉사하고

내가 남들보다 많이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나의 공로입니다.

내가는 결국 나의 공로를 남기고

결국 다른 사람보다 많은 지분(?) 요구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많은 대접을 받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리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망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눈물입니다.

 

 

불러 앞에 우리의 자세는 공로없음입니다.

내가 없음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입니까?

사람은 자신의 <공로> <내가> 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철저히 자격 없음에 묻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특별한 부르심으로 불러 세우셨는가요?

자격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접을 받고

사람들에게 뭔가 말할 세상적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것을 요구하지 않을 사람들이라서 그렇습니다.

 

바나바도 사울도 그런 자격의 요구를 없는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권위자라는 이름까지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이미 자신이 세워지기를 포하한 사람임을

사울을 부르는 과정에서 알게 되어졌습니다.

 

사울을 데리고 사람,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한 사람,

사울을 다소에서 불러온 사람이라는 것은

사울로 인한 욕과 원망과 질책을 감수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명예나, 자신의 이름이나 자신의 어떤 자리를 요구한다면

그는 사울가까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가까이 합니다.

성령은 그것을 높이 샀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는데 자신의 전부를 드릴수 있다면

성령의 ,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불러 보내기에 충분하다는 결정을 성령은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입니다.

사울은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도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자신의 경력을 알기에 그는 이루면 이룰 수록

자신의 전부 나의 전부를 공로화 시키지 않을 사람임을 성령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소개할 죄인 중에 괴수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사람의 공통점은 <불러> 알았고

<내가>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누구를 불러 사용하시는가?

누구를 기뻐하시는가?

 

자신의 공로를 찾지 않을 사람,

공로 자체를 세울 없는 모세와 바울 같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들에게 나의 지분,

나의 공로,

나의 이름을 놓는일에 가장 확률이 적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이고

그래서 더더욱 자격없는 바울입니다.

 

바나바가 끝이 아니라 바울이 끝으로 가야하는지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그런 측면에서 자격이 너무 많습니다.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너무 학위를 많이 가지고 있고

너무 경력이 많고

너무 말이 많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자격을 상실하게 하는 이유인데

세상은 그것을 명확하게 알기에

그것에만 목숨을 걸게 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자격없음인데 자꾸 자격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자격있는 담임목사를 뽑으니

자격없는 사람을 세우시는 성령과 상관없는 사람에 세워지니

교회는 자꾸 세속화되고 자기 이름 내기에 바빠서

주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은 관심도 없어집니다.

 

 

교회를 이기려는 세상의 전략에 여지 없이 무너지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찾는 사람은 자격 없는 사람인데

요즘 교회가 찾는 사람은 자격 있는 사람입니다.

 

 

<불러> 조건은 <내가>없어야 하는데

<내가> 자꾸 높아지니 <불러> 사라집니다.

 

 

<불러> 없는 교회

<내가> 채워진 교회는 자꾸 성령의 방향이 아니라

교회 안에 머무르게 되고

교회 안에 머무르는 교회는 주님의 눈물,

성도의 눈물이 되어 돌아옵니다.

 

 

 

 

둘째는 <구별>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구별하심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구별하셨습니다.

날을 구별되이 하셨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영원한 일하심의 방향입니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세상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것의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주님은 주님의 백성을 구별하셨습니다.

 

 

주님이 거룩하게 세우는 사람들

거룩한 사명을 주신 사람들은 구별하셨습니다.

 

 

" ~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20:24]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위해 구별하셨습니다.

 

오늘 성령은 바나바와 사울을 구별하십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

 

 

이미 거룩한 백성안에 들어온 구별된 사람에게 특별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을 위해 따로 세우십니다.

그것이 구별입니다.

 

세상과 주의 백성을 구별하듯,

성도 안에서 거룩한 사명을 위해 따로 세우심은 바로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하여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나 구별은 특별한 축복이이기는 하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적 복이 아닙니다.

구별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기에 적합한 사람을 따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구별은 목적을 위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따로 세우십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구별이 아니라 공동체적 구별입니다.

스스로 구별이 아니라 공적인 구별입니다.

공적 선언이고

공적 인정입니다.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아무나 내가 뭔가 하겠다고 없고 성령은

사람을 세우기 위해 구별하여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구별된 사람에 대한 오해를 금해야합니다.

구별은 세상의 핍박과 박해를 전제로합니다.

 

구약에서부터 그래왔습니다.

그래서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금식과 기도입니다.

 

 

 

셋째는 <금식> <기도>중입니다.

 

사람을 세울 하나님은 우리에게 금식과 기도로 준비하게 하십니다.

금식 중에 성령이 말씀하셨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사람을 보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발생할 금식했던 것이 구약의 전통입니다.

생사의 문제,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일을 당할 금식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로 금식 것은 민족적 문제가 발생할 ,

그리고 생사의 문제가 발생할 때입니다.

 

 

성령의 일하심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금식과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위해 사람을 세울 그냥 적합한 자격을 따집니다.

학력을 보고

경력을 보고

자질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담임목사를 세울 ,

뽑을

선교사를 세우고 뽑을 ,

파송할 ,

장로를 세우고 임직자를 세울

기도하며 금식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민족의 문제,

생사의 문제가 생길 금식했던 전통을

사람을 세울 금식과 기도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만큼 사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이 생명이고

사람이 전부라 여기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금식 가운데 성령이 이르셨고

그만큼 중요함을 인식한 그들이 금식과 기도로 안수하여 보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은 사람을 세울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일은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뽑고

사람을 보낼 우리는 금식하고 기도해야합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 뜻을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전통이 되어야합니다.

 

 

 

 

교회의 아픔은 성령의 <불러> 대신

내가 성령의 <불러> 대신하고

<불러> 자리를 <내가> 대신 하기에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러를 통해 가는 사람은 자격 없음을 알기에

자신의 전부를 드리지만

<불러> 아니라 <내가> 채워진 사역과 신앙과 믿음은

결국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힘과 능력보다

사람의 힘과 능력을 믿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는 자격의 충족은

결국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격이 됩니다.

 

 

성경의 역사는 그것을 알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알기에

자격 없는 자를 부르시고

죄인을 부르시고

마른 막대기 같은 사람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마구간이고

구유이고

베드로이고

사울이며

그런 사람만을 불러 사용하시는지?

 

 

한국입니까?

한국교회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나라,

아무 것도 없던 나라,

나라가 제사상에 피운 향이 코를 찌르며

집걸러 무당 굿판을 벌리며

한집에 사람씩 알코올 중독에 노름에 빠져 가정이 파괴 되어가던 한국에

하나님은 복음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자격 없던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자격을 갖추어가니

성령의 불러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격 있는 사람만 부르고

능력 있는 사람만 교회 안에 남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남고

그래서 교회는 없고 아픔만 남습니다.

 

 

세상이 버린 교회는

주님도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회복할 것은

주님의 <불러>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금식과 기도로

내가를 없애야합니다.

 

금식과 기도는 다른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러> 무시하고 죽이려는

<내가> 먼저 죽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불러> 반대는 <내가>입니다.

 

 

 

 * 새롭게 개척할 지역에서 토고자니 목사와 사역할 구바네 전도사부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시고 성령께서 길을 여시고

이라크(IRAQ) 700평의 땅을 허락하셨고 이제 12번째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구바네 전도사는 이미 교회 옆에 양철 집을 짓고 지역주민과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러 따로 세우신 은혜입니다.

지역과 교회 부지 그리고 사람을 세우신 주님께

기도와 금식으로 성령의 역사가 더욱 풍성하게  이뤄지며

교회 개척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