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방향성(행12:11-25)
오늘 성경은 이상합니다.
11장 30절부터 12장 25절은 같이 연결하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야고보가 죽은 이야기,
베드로가 감옥에서 살아난 이야기를 넣고 있고
헤롯이 벌레에 먹혀 죽은 이야기를 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장 1절1부터 24절은 끼어있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11장29-30절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
12장 25절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결국 바나바와 사울의 이야기를 하다가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온 이야기와
헤롯이 스스로 왕의 영광을 취하다 죽은 이야기를 넣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8장부터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8장은 사울이 스데반이 죽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복음이 박해로 인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고 있음을 밝힙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8:1)
아니 사도행전 자체는
이미 어디로 갈지 1장부터 보여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1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대화를 기록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고
그 방법은 예루살렘을 시작해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 끝을 향하여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은 결국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는데
그 성령의 방향성은 땅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향성의 이야기, 유대를 넘어 안디옥에 일어난 이야기를
11장에서 합니다. 그리스도 인이 되었고 온 지역에 흉년이 든 예언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이 유대의 형제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기로하고
그곳에 갔다 왔다는 것을 12장 말에 말하는데
그 중간에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은 지금 유대에 머물지 않고 성령의 마음은 세상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에서 시작된 복음은 사마리아를 거쳐 지금 안디옥에 와있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에 흉년이 들자 안디옥 교회가 유대교회를 위해 구제금을 전달하고
결국 마가를 데리고 왔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 마가는 결국 사울과 바나바와 전도 여행을 다닌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늘 그렇습니다.
남들 다 죽는 상황에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셨다,
남들 다 어려운 상황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넉넉한 형편으로 길을 여셨다,
남들 다 힘든데 우리 집은, 내 사업은 이렇게 복을 받았다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복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유대적 복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들의 신앙의 한계는 특별한 선택,
선택된 민족,
하나님의 특별한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는 우월 신앙에 잡혀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특별함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장본인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그런 특별함에 갇힌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이 이런 복을 주셨고
남들 다 어려운데(감옥)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나왔다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안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럼 죽은 야고보는 은혜를 못받은 사람입니까?
왜 베드로를 살려주셨습니까?
왜 기도에 응답하셨습니까?
기도의 응답,
목숨을 살려주신 <성령의 방향성>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방향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유대적 복음> 안에 갇히게 됩니다.
성령의 방향은 지금 이방에 있습니다.
성령의 목적은 유대교회 안에 머물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교회를 세우고
그들이 복음을 알고 사랑을 알고 유대교회를 위해 구제를 했지만
그들의 원래 사명,
성령의 원래 방향성인 이방을 향하여,
다시 세상 땅끝을 향하여 돌아왔다는 것이
11장 30절에서 12장 25절로 바로 연결되도록 만든 성경 저자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우리 가정에 주신,
나의 사업에 주신 특별한 은혜와 복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참 복이고 기쁨임을 압니다.
그러나 성령의 방향성을 상실한 특별함은 정말 특별한 버림이 되고
특별한 아픔이 되고
특별한 눈물이 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 기도하는 곳으로 갔지만 결국
그는 바로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성령은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길 원치 않으심을 베드로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항구는
항해의 목적을 가진 배만이 항구가 됩니다.
항해의 목적이 없는 배는 결국 버려집니다.
낡아집니다.
외면 당합니다.
지금껏 배푸신 은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자꾸 회의가 오고 침체되고 성장이 없느냐?
성령의 방향성을 좇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방향성을 좇지 않는 곳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더 이상 유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잘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더 이상 <은혜의자리>인 유대에 머물지 못합니다.
유대에서 일어난 기적을 더 이상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은혜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더 이상 그것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니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 안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어느 곳에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곳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기뻐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성령이 원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성령은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합니다.
어느 방향에서 어디로 부느냐를 말합니다.
어디서 불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어디로 간다는 내가 바람을 맞으면 압니다.
우리는 내가 바람을 맞았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어디로 불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성령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종종 잊어버립니다.
아니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반드시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한 은혜의 자리에 머물고 싶고
그것을 말하고 싶고
그것을 붙들고 싶은 마음에
성령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방향성을 잊어버립니다.
성령의 목적은 정해져 있고
성령의 본질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그것에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내가 그것을 인식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복음이 강력하게 전해진 곳에는 반드시 환난이 있었음을 아십니까?
복음의 부흥이 있었던 곳에는 반드시 핍박이 있었던 것을 아십니까?
복음의 부흥을 두 가지로 인식해야합니다.
<머무름>과 <방향>입니다.
첫째 머무름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파송을 받아 가서 안디옥교회에 한 말이
<머무름>입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11:23)
이 머무르다는 말은 원어적으로 관계를 갖다는 말입니다.
어떤 한 장소에 한 사람과 머물러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역한글 성경은 <붙어 있으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의 환경안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좋은 환경,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이 주신 기적의 환경 안에 머무르는 것은 결국 축복이 아픔이 됩니다.
우리의 머무름은 환경이 아니라 관계성입니다.
주님과 가지는 관계성 안에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둘째는 방향성입니다.
머무름의 조건은 <함께>입니다.
주님과 함께인데 우리는 주님과 상관없이 머무르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주님없는 머무름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훈련하기 위해서
광야 40년 동안 함께 다니는 훈련만 시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입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그들이 움직이고 그것이 서면 그들이 정착합니다.
주님과 함께 움직이는 훈련을 받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자꾸 좋은 환경에 목숨을 건다는 것입니다.
좋은 기적을 경험하고
좋은 일을 은혜로 경험하면 자꾸 그 안에 머무려합니다.
아닙니다.
환경이 아니라 주님 안입니다.
주님과 함께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철저히 성령의 방향을 따라갑니다.
사도 바울의 특징은 자꾸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의 전도 여행은 머물지 않습니다.
성령이 가는 곳으로 그도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방향성을 따라 갑니다.
방향성의 감각의 상실은 결국 핍박으로 찾아옵니다.
아픔으로 찾아옵니다.
우리의 머무름은 결국 성령의 방향성을 따르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원한 머무름은 천국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아닌 곳에서 머무름은 눈물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한계는 유대적 복음안에 갇힌 것이고
우리의 희망은 성령의 방향성을 따를 때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환경적 머무름안에 있길 원치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한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이끄심의 영입니다.
늘 한 방향을 향하여…
* 선교지를 다녀오다 길가에 핀 꽃을 찍었습니다.
들꽃의 목적은 꽃이 아닙니다.
들꽃의 목적은 씨 뿌림입니다.
씨 뿌림 없는 꽃은 꽃의 의미가 없습니다.
새싹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꽃을 피우고 꽃이 열매는 맺는 목적은
씨 뿌림입니다.
그것이 자연세계와 영적 세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운행방법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화려함만 마음이 있습니다.
화려함을 지나고
꽃을 지나야 씨 뿌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꽃처럼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화려함과 꽃처럼에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