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과 사명(행12:1-10)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왜 야고보는 칼에 죽고 베드로는 감옥에 있는데 천사가 그를 건져줍니까?
같은 하나님인데, 같은 사도인데 같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야고보는 칼에 죽고 베드로는 기적가운데 살아납니다.
같이 예수를 믿는데 어떤 사람은 세상 말로 잘 풀리고
어떤 사람은 죽어라 고생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같은 목회자인데 어떤 사람은 죽어라 고생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대접 받는 곳으로
다니는 것을 봅니다.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모이고
내가 가는 곳 마다 천사를 통해 사람들을 놀래키는 일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는 첫 순교자의 자리에 섰습니다.
나는 불평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역하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늘 데리고 다녔는지,
왜 예수님은 특별한 제자들만 데리고 다녔는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야고보가 첫 순교의 자리에 섰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야고보의 순교는 불평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영광스러움과 하늘의 영광을 본 사람에게만
주시는 영적인 영광을 통해 그 순교가 불평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를 그렇게 챙겨 다니셨는가?
그것은 세상에서의 특별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랑은 늘 더 많이 드리는 기쁨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안에 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집도 거처도 없이 핍박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주어지는 고난이상의 은혜를 하나님은 늘 미리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그렇습니다.
첫 순교자가 되기 이전에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영적인 위대한 체험을 통해
기꺼이 그 일을 가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던 놀라운 기적들을 구분되어보았습니다.
변화산의 예수님의 변화를 보았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바로 옆에 있었고,
갯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도 옆에 있었습니다.
이 기적들은 특별히 몇 명에게만 보이신 기적인데 그 중에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니실 때 특별한 장소 특별한 영적 체험의 장소는
늘 예수님께서 함께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더 예수님의 죽음과 영적인 길과 세상의 핍박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더 깊은 체험은 더 깊은 영적인 자리로 나아가게 하고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헌신은 주님과 깊이 나눈 영적인 체험과 비례합니다.
야고보는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세상에서 믿는 자가 당하는 핍박과 죽음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것은 불평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세상의 핍박을 감당할 하나님의 미리 주신 영적 특혜와 기쁨이 그 핍박을 감당하게 합니다.
모세가 200만 대군을 이끄는 그 무거움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깊은 영적인 체험을 경험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의 영적인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것은
삼 년 반의 까마귀와 과부의 집에서의 하나님의 깊은 영적 체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갈멜산 전쟁을 위해 삼 년 반을 하나님의 깊은 체험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삼 년 반의 시간 없이
모세의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없이
세상에서 주는 어려움을 이기려합니다.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하고 설칩니다.
내가 믿습니다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무조건 그것을 이기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영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영적인 하나님으로 인한 체험이 아니면 세상에서 세상의 시험을 감당치 못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영적 경험만큼 세상에서 쓰이 받는 것입니다.
그 영적 경험은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려 하고 바로 갈멜산을 가려 하고
바로 세상 한가운데로 가려합니다.
하나님은 충분한 영적 만남의 시간을 주시려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다고 바로 세상의 한 가운데로
보내지지 않습니다.
충분한 하나님과 만나며 목회를 훈련하고 영적인 체험을 통해
세상 한 가운데 서도 밀리지 않을 영적인 경험을 하고 나서
하나님은 그를 로마 한가운데로 보내게 됩니다.
한마디로 야고보는 첫 순교자라는 이 이름 하나를 위해
지난 삼 년 동안 예수님의 옆에서 깊은 영적인 체험,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하늘의 이야기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 영광이 오늘 세상에서 첫 순교자의 자리에 세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는데 천사가 그를 건져내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야고보는 바로 죽고 베드로는 또 천사가 건져내 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명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명의 문제를 비교의 문제로 봅니다.
주님은 야고보를 첫 순교의 자리로 부르신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이끄는 자리로 부르신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불평은 사명을 빼고 말하면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명이라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보면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순교는 불평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사명이라는 것으로 보면 야고보가 당한 일은 영광입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울은 이방을 위하여 보내집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멜산 싸움을 원치 않았고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원치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방으로 가라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다 부르신 부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으면 불평이 생깁니다.
그 사명을 채울 영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늘 다른 생각이 납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세우고 결국 야고보처럼 죽게 됩니다.
언제 죽느냐가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고 죽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를 핍박합니다.
원수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자꾸 영적 체험만 원합니다.
더 깊은 영적 체험
더 깊은 영적 만남,
더 깊은 영적 충족을 원합니다.
그러나 알아야합니다.
깊은 영적 채움의 목적은 사명을 이루기 위함인 것을…
사명을 향하지 않는 영적 체험은
결국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교만의 이유가 됩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죽이려던 헤롯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처럼
더 나아가 하나님처럼 여기자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챕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벌레에 먹혀 죽게하십니다.
사명은 곧 하나님의 영광으로 갑니다.
그 영광의 마지막을 내가 차지하면 결국 죽습니다.
같은 죽음에 다른 영광입니다.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두 사람의 죽음을 오늘 12장은 비교합니다. (2, 23)
야고보의 죽음과
헤롯 왕의 죽음입니다.
사명을 알고 사명 대로 가는 인생은 그것이 십자가여도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왕이어도 사명대로 살지 않으면 벌레가 먹는 부끄러움입니다.
아름다움으로 사시겠습니까 부끄러움으로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이
우리를 사명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영적 체험은 사명으로 이어져야 아름답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아름다운 사명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 몬스트로노스 교회입니다.
지난 일년 동안 이 교회는 사역자 때문에 너무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사역자 한 사람이 얼마나 교회에 큰 영향을 주는지
체험한 시간입니다.
깊은 영적 체험과 인격이 준비된 사역자로 인해 교회가 아름답게 서가는 것을 이제 봅니다.
역시 교회는 사역자의 인격과 영적인 깊이에 따라 달라짐을 보며
스스로 그런 사역자인지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가 늘 저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선교지의 교회들을 맡고 있는 사역자들에게 더 깊은 영적 깊이가 더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