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일하시는 무대(행10:9-48)
성령을 알지 못하는 고넬료는 천사가 앞일을 지시합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성령께서 앞일을 지시하십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3)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19)
그리고 그들이 만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고넬료의 집에서 만남을 가집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시는 생각에 자신이 지금껏 믿어오던
신념과 믿음과 가치관을 전부 던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어던 것,
내가 가졌던 가치관들,
내가 가졌던 관습들을 하루아침에 버렸습니다.
오직 성령,
오직 하나님의 천사의 말을 순종해서입니다.
다 기도하던 중에입니다.
우리는 늘 기도중에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성으로
그냥 내가 가진 가치관으로
그냥 내 마음에 따라,
내 지식에 따라서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소리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말씀할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전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증언자를 찾습니다.
증인을 찾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서 설교하던 중에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별 내용이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와 나사렛 예수의 고치심과 가르치심 그리고 사람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사흘만에 살리시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거기까지 듣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온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우리에게 지극히 상식이 된 이 복음의 내용으로도 성령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것은 전하는 자의 삶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믿는 것이 곧 전부입니다.
믿는 것이 곧 삶이고
삶이 곧 믿음입니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증언하는 삶을 삽니다.
믿음이 맞다고 여기는 것면
기도하고
기도하고 마음이 오면 전부를 드려 구제합니다.
성령이 마음을 주시면 룻다든지 욥바든지 어디든 갑니다.
치료하라면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라면 죽은 자를 살립니다.
한마디로 베드로와 고넬료에게 주어진 복음은
100%입니다.
아는 것이 그들에게 삶이 됩니다.
아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
아는 것이 삶이 됩니다.
아는 대로 살고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천사가 전하면
내 가치,
내 생각,
내 이성을 내려 놓습니다.
그들이 삶을 이끌고 사역을 이끌고사람을 이끌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평소에 상종하지 않던 이방인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이방인도
성령의 말 한마디에 모든 받아들이고
함께 인사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잠을 잡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의 차이입니다.
복음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 단순한 복음에 어떤 사람이 전하면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고
어떤 사람이 전하면 너무 나약한 복음이 됩니다.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 즉 증이니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은 증인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를 전하지 않고 자기를 전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경력과 자기의 화려함을 전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자기의 이름이 만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의 능력이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회만 되면 자기를 증언합니다.
자기를 증언 하는 사람과 나사렛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차이 한가지는 내 가치과 생각과 이성도 내려 놓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의심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믿음의 싸움은 이성과의 싸움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세상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믿음의 싸움은 논리의 싸움입니다.
자기 이성,
자기 논리를 버려야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자는 복음의 폭발적 능력이 드러나지 못합니다.
자기의 삶도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삶도 능력있게 인도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생각을 주시고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면
내 생각,
내 이성,
내 가치를 내려 놓아야합니다.
그냥 내려 놓아야합니다.
그냥 말씀이 오면 따라야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힘이 순수하게 나를 통해 역사합니다.
베드로의 말씀은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말하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그리고 우리가 이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믿으면 그의 이름을 힘업어 죄 사함을 받는 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너무 복음이 복잡해졌습니다.
너무 설교가 세상 교훈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논리를 갖다대고
이런 저런 학문을 인용하고
이런 저런 사상을 갖다 쓰지만 거기는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몰라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무대를 만들지 못해서 능력이 없습니다.
복음은 철저히 성령이 이끄십니다.
사람은 철저히 성령이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그 일을 하려고
이런 논리 저런 논리로 접근하고
이상한 복받는 이야기
이상한 예화로
이상한 철학으로
이상한 교훈과 세상적 감동만 전하려합니다.
거기에는 교훈적 감동은 있지만
영혼의 변화,
성령의 감동은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성령이 일하게 하는 삶이어야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가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말보다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백 걸음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 백걸음의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따르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갓 예수를 믿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하루에 한 시간씩 3년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거의 빼 먹지 않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깨달은 것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집에 갈까 교회를 가서 기도할까를 늘 고민했습니다.
거의 하루도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성령의 마음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성령의 생각을 따르면 따를수록
내 마음에 놀라운 힘과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도 처음에는 내가 시작했는데 할 수록,
그 훈련이 될 수록 성령이 주시는 기도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따르는 훈련을 했습니다.
내 마음,
내 생각이 아니라
그냥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따라 살았습니다.
주라면 주고
가라면 가도
나누라면 나누고
기도 하라면 기도합니다.
그 후의 나의 삶은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며
가장 민감하게 성령에 반응 하는 삶으로 날마다 성장하고 있습니다.
벌써오래전부터 되어진 훈련들인데
여기 선교지에서 많은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앞서면 선교지는 망하는 곳입니다.
내가 내 이성,
내 판단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사람을 세우면 무조건 망하는 곳이 선교지입니다.
선교지는 영적으로 더욱 민감하고
더욱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내 생각,
내 이성,
내 판단을 버려야합니다.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가 성령의 통로가 되고
너무 간단한 복음에도 성령이 충만하게 된 비밀을 그들은 삶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필요한 지식과 학문보다
아는 말씀과 지식을 채우는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드리는 훈련입니다.
그 훈련을 통해 성령은 나를 통해
새로운 고넬료와 같은 이방에 성령의 충만을 채우실 것입니다.
* 몇일 전에 다빈이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아직 다 마친것은 아닌데 졸업행사를 한것이지요.
학교 가기를 좋아하는 다빈이가 큰 어려움 없이 유치원을 잘 마친 것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빈이가 이제 내년부터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실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