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인생(행9:26-31)
교회의 시작은 용서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시작은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바울의 시작은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이고 제자 아나니아의 순종입니다.
그리고 오늘 결정적으로 바나바가 나옵니다.
바나바에게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지금 그가 예수를 믿고 변한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갑니다.
제자들이 사귀는 것을 두려워하고 꺼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을 데리고 그간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사도들에게 설명합니다.
중재자가 됩니다.
교회가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서 평안하고 든든히 세워지며
성령의 위로로 그 수가 더 많아집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가 다리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과 바울을 연결했고
바나바는 교회와 바울을 연결했습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해야합니다.
첬째,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든지
둘째,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은 결코 중간의 중재자,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다리로 예수님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로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교인과 교인을 연결하는 일에 여러분을 사용하십니다.
주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다리로 사용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무 의미 없는 삶일지 모릅니다.
자기 삶을 잘 사는 것이 잘 산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은 다리 역할을 잘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상과 하나님의 다리로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늘 다리로 사용하심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과 사람의 다리가 되든지
사람과 사람의 다리가 되든지 해야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주님의 다리가 되고
바울은 이방과 주님의 다리가 됩니다.
그 바울을 위해 바나바는 공동체와 바울을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참 지도자이고
그것이 참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고립은,
홀로는 죄입니다.
연결하지 못하고
연결되지 못함으로 오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복음이 흘러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연결하는 다리로서의 삶으로 불렸는데
그 연결하는 다리를 파괴하고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자멸하는 삶은 나도 죽이고 세상도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되는 삶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 사명이 되야합니다.
이전에는 사울처럼 사람들이 꺼려하고 두려워하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나를 통해 그 사람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인데 나를 통해 예수를 발견하고
예수님과 교통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야합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비결은
그런 연결점에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없어도 되겠지
내가 사라져도 되겠지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은
징검다리에 돌 하나를 빼거나 둘을 빼면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됩니다.
물에 빠지는 위험,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입니다.
장성한 사람은 하나쯤 둘쯤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들
징검다리 돌 하나가 버거운 사람은 곧 실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가 중요합니다.
바나바가 아니면 사울은 늘 고립의 삶을 살게 됩니다.
아나이아가 아니면 사울은 얼만 고생을 해야하는지 모릅니다.
왜 다메섹일까요?
왜 사울이 다메섹 가는 중간에 눈이 멀고 주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날까요?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 .
다메섹에 아나니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가까이 있어서입니다.
사울이 헤랄파 유대인들과 변론하고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것은
바나바가 사울을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소개하고 알게 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사울을 죽음에서 건져 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징검다리 역할은 한 사람의 신앙도 살리지만
한 사람의 생명도 살리며
교회도 살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징검다리 역할,
내가 생명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무엇입니까?
나만 알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나만 알던 삶이
다른 사람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그 능력으로 사람이 세워지고 교회가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떻다
어떤 사람이 어떻다라는 생각과 판단보다
내가 징검다리로서의 삶을 살고
나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지를 고민해야합니다.
우리는 사울을 판단할줄은 알지
사울을 나를 통해 지나가게 할 줄은 모릅니다.
주님은 늘 아나니아와 바나바를 찾습니다.
주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늘 아나니아와 바나바를 통해 일하십니다.
죽음을 피해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가서 숨어지내다
그를 부흥의 주역으로 인도한 징검다리는 다시 바나바가 됩니다.
교회의 든든히 세워짐과 성령의 위로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주인공 하려는 욕심으로
다리 정도,
징검다리 정도는 우습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징검다리를 소중히 여기는데
우리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다리를 놓으려 하지 않습니까?
다리는 없습니다.
오직 징검다리,
나를 밟고 지나가는 징검다리를 찾으십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기도하고 안수하고 성령충만케 한 후
성경에 기록조차 없습니다.
바나바는 늘 사울의 다리가 되어 그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울로 부르셨다면 우리는 사울이 되야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
사울은 한명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한사람의 사명을 위해
수 많은 징검다리를 사용하십니다.
사명은 한 가지입니다.
온 세상에 주님의 이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아나니아면 어떠하고 바나바면 어떠합니까?
각자 다 사명따라 사는 인생,
부르심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
아나니아로서도 감사하고
바나바로서도 감사하면
그것이 기쁜 것입니다.
저는 평생 부교역자로 한 목회자,
한 사람의 리더를 섬기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있습니다.
저에게 최고의 리더가 되고 최고의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지금도 누구든 주께서 저 사람을 평생 섬기라면 그렇게 얼마든지 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울이 아니어도 됩니다.
저는 베드로가 아니어도 됩니다.
다면 나를 통해 단 한 사람이어도
나를 밟고 세상을 향하여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데
징검다리로서의 삶을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