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까지 빛나는 사명(행9:21-27)
사울을 부르신 목적이 오직 한가지입니다.
예수의 이름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
사울의 삶의 목적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은
부르심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 사명입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이끌기 위해 존재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과 임금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 가장 위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분류합니다.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은 오직 두 종류입니다.
부르신 부름에 맞게 사는 인생과
부르신 부름과 반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사울을 부르신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할 때 사울은 모든 것을 보장 받습니다.
죽이려는 사람들 속에서도
폭풍 속에서도
사십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 맞아도
몽둥이로 맞고
돌에 맞고
세번 파선하고
수 없는 위험을 지나더라도 그가 생존하는 이유는
그에게 예수의 복음을 이방과 임금에게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어서입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그가 주께서 그를 부르신 사명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안전한 상황이어도 그가 부르신 사명 안에 없으면
그곳에 죽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와 목적이 희미해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울은 주님이 부르시기 전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세운 사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전하는 것이 사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에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세운 사명과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입니다.
사명은 내가 원한다고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일치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좋아해서 내가 잘해서 내가 기뻐서 하는 자기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좀 못해도,
내가 좀 안 기뻐도
내가 좀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를 전하는 것은 사울에게 죽을 고비는 넘기는 일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첫 순간부터 유대인들이 죽이려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몰래 도망시켜줍니다.
그가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죽음이 늘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사명을 따르면 사람을 죽이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따르면 세상을 살립니다.
사명 따라 산다고 인생이 형통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의 사명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참 형통은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명 따라 살면 잘 산다는 공식은 그에게 없습니다.
주님이 사명을 주셔서 함께 해주신 형통 할 것이라는 공식은 그에게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더 힘들고 더 아프고
더 죽을 맛입니다.
그런데 그는 사명이기에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명이 있는 자의 특징은
이끌림 안에 있습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형편과 나의 연건과 상관없이
나의 전부를 던져서라도 이루고 싶은 것 그것이
<이끌림 안에 있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사명따라 오셨습니다.
그래서 광야라도
사단에게 시험을 받는 것도 성령이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4:1)
그리고 사울도 주를 만나고 이끌려 갑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9:8)
진정한 사명은 이끌림 속에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계획과 생각은 실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우리의 사명도 주께서 빛 가운데 인도하셔야합니다.
그래서 그 빛이 사람을 붙이시고 사람을 통해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도 내가 끌려 하고
사명도 내가 끌고 가려합니다.
그래서 사람도 통제하고 사명도 내가 만들어 세우지면
결국은 나의 나라를 세우게 되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는 못합니다.
나를 끌고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혹시 돈 아입니까?
돈 때문에 살지는 않습니까?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것이 돈이라면 돈이 당신의 사명입니다.
사람들을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까?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을 제한하고 사람을 내가 조종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이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사울처럼 권세를 받아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힘을 가지고 싶은 것은 아닙니까?
다 자기가 사명이어서 그렇습니다.
사명은 자기가 세우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는 것입니다.
사명을 다시 찾아야합니다.
사명은 내 것을 포기할 때 찾아옵니다.
내 사명을 내 손에 쥐고 있는 동안 사명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주시기 위해
눈을 멀게 하십니다.
인간적인 소망을 끊으십니다.
육체의 길을 막으십니다.
눈이 멀고
길이 보이지 않고
육체의 모든 소망이 끊어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소망이 끊어졌습니까?
희망이 없으십니까?
소망도 없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의 소망이 끊어질 때 찾아오는 하나님의 사명에
이끌림바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육체의 소망이 끊어지는 시간에 성령이 이끌어 가셨습니다.
천사들이 수종들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울의 자기 사명이 끊어질 때 하늘의 사명이 찾아옵니다.
사명이 찾아오지 않는 인생은
자기 사명을 끊으로 가는 중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은 오직 한가지를 하십니다.
우리의 사명,
내가 가진 사명을 끊으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명
하늘의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시작은 자기 사명에 목숨을 걸 때가 아니라
비록 이 땅의 소망이 끊어져도 하늘의 사명이 찾아올 때부터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가 사명으로 삼던,
자기가 힘으로 삼던 모든 것을 버립니다.
그냥 버리는 것도 아니고 배설물처럼 버립니다.
자기 사명을 위해서 세상의 것이 필요하지만
하늘의 사명을 위해서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것만으로 살 수 있음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기 사명을 버리고 하늘의 사명으로 산다면서도
아직 세상의 것으로 살려는
세상의 것으로 사명을 감당하려는 믿음 없음을 버려야합니다.
하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사명을 위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안전을 지키시고
물질을 채우시고
사람을 보내십니다.
결국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을 충만 받지만
바나바를 통해 그의 모든 사역의 길과 앞으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모세에게 사명이 오자
그의 약함을 채울 아론이 준비됩니다.
사명은 나의 약함을 하나님이 어떻게 채우시는 지를 보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삶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 힘으로 나의 사명을 감당하며 사람까지 죽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힘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붙들면 됩니다.
나의 사명이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이 나의 전부를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의 위대함은
그 사람의 사명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크기입니다.
이 땅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사명 없이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 사명보다
다른 사람의 사명의 크기를 재려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명이 무엇인지 계산하고 나와 비교하려합니다.
베드로가 내 양을 먹이고 치라 할 때 그가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은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요한이 어떻게 되든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사명은 비교할 때가 아니라
유일한 것으로 믿고 감당할 때입니다.
사단은 자꾸 이전 나의 사명과 지금의 하늘에서 온 사명을 비교하게 하고
내가 받은 하늘의 사명과 다른 사람이 받은 사명과 비교합니다.
그래서 숫자가 작게 모이는 사역자는 숫자가 많이 모이는 사역자와 비교하고
이름이 나는 사역자와 이름이 나지 않는 자와 비교하고
공부 잘하는 자와 공부 못하는 자를 비교하고
돈 많은 자와 돈 없는 자를 비교하고
좋은 직장과 그렇지 않은 직장을 비교합니다.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목숨을 내어 놓고라도 내가 던져야할 일입니다.
그것은 크게 되냐 작게되냐
그것은 잘 나가냐 못나가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명,
그것은 내 목숨을 담보로 이 땅에서 전부를 걸어야 할 일입니다.
목숨을 걸고 달리는 사람이 옆 사람 쳐다볼 상황이 안됩니다.
작으니 사명입니다.
없으니 사명입니다.
힘드니 사명입니다.
사명을 감당한다고 세상에서 대접받고
사명을 감당한다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내 전부를 포기하고 다 드려도 괜찮은 일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부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명을 감당하고 그 사명은 놀라운 열매를 맺습니다.
바울이 감당한 사명,
자신의 전부를 걸고 믿음으로 달려가 사명은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임금뿐 아니라
성경으로 기록이 남아 지금껏 그의 이름과
그의 사역과 그로 말미암아 기록된 성경이 우리에게 능력이 됩니다.
나의 사명은 나도 못 살리고 다른 사람도 죽이지만
하늘의 사명은 나도 살리고 지금 만나는 사람도 살리지만
나의 후손,
그들의 후손도 살리는 사명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영원까지 빛이 나는 것입니다.
* 우리의 사명은 주님이 주신 사명의 땅끝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의 땅끝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땅끝입니다.
내가 드려야 할 사명의 땅끝,
내가 바쳐야 할 모든 수고의 땅끝은 무엇입니까?
(케이프타운 희망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