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를 사용하시는 이유(행9:10-20)
이상하지 않는가?
왜 예수님은 사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시고 소리로 말씀하시는데
왜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사울을 찾아 가라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 하고
그에게 사울을 부르시는 주님의 목적을 말씀하시는가?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그냥 전부를 직접다 말씀하시면 안되는가?
왜 아나니아를 통해 환상을 보게하고
안수하게 하고 성령을 충만하게 하시는가?
왜 아나니아를 사용하여 사울을 세우시는가?
첫째, 성령은 스스로 채울 수 없다.
성령은 결코 스스로 충만케 되지 않는다.
반드시 성령을 받은 사람을 통해 성령을 충만케 하신다.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통해,
말씀을 수종 드는 자를 통해 성령을 충만케 하신다.
어디에서도 사도들 또는 말씀을 증거하는 자가 아니면
성령의 충만을 입은 역사가 성경에는 없다.
성령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을 통해서 임하셨지만
성령은 성령을 경험하고 말씀을 수종 드는 사람을 통하여 다시 전해지는 것이다.
사울은 성령을 전달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였다.
둘째, 사울의 존재를 스스로 입증할 수 없다.
공동체를 통하여 사울의 존재를 확증한다.
만약 사울이 스스로 회심하고 스스로 성령충만했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아나니아에게 그의 존재를 알리고
공식적으로 그의 소식을 온 교회가 알도록 하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그래서 사울은 아나니아를 만난후에 제자들과 함께 교제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더 구체적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깨닫게 된다.
셋째, 사울의 사명의 확인이다.
주님이 사울을 부르신 것은 한가지 이유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서이다.
사명은 스스로 받기도 하지만
함께한 공동체,
함께한 사람을 통해서 확인 된다.
사울의 사명,
부르심의 목적은 처음 주를 만났을 때가 아니라
아나니아를 만났을때 확인했을 것이다.
스스로 사명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성령을 전하며 복음을 전하는 아나니아를 통해 그에게
부르심의 목적과 사명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변한다.
세례를 받고 제자들과 몇일 지나고
그리고 바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파한다.
그리고 모두다 놀라고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한다.
오늘 사울이 세워지는 사건을 통해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은 절대 혼자에게 사명을 주고
혼자에게 성령 충만을 주고
혼자 뭔가를 받았다고 세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사울에게 성령도 충만케하고
사명도 목적도 깨닫게 할 수 있는 대목인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아나니아에게 사울의 존재를 알리고
환상을 보고
기도하게하고
안수하게하고
성령을 충만케하고
사명을 깨닫게 하신다.
모두 아나니아를 통해서이다.
사람의 완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사람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인정할 때 이루어진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인정해야한다.
사울은 죽이려던 그리스도인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안내 받는다.
하나님은 결코 성령 안에서 혼자는 없다.
<함께>이다.
성령은 결코 혼자 일하지 않게 하신다.
함께 완성되게 하신다.
이후 바울은 바나바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또 완성되어짐을 경험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실수는 마가의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투게 된다.
함께를 잊는 순간 다투고 헤어지는 아픔을 경험한다.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인정되어진다.
예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기억해야한다.
성령의 일하시는 방법을 기억해야한다.
그것은 함께이다.
그래서 혼자서 뭔가를 하는 것은 아무리 잘 해도 미완성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일을 잘하고
아무리 탁월해도 혼자는 혼자다.
성령은 함께를 원하신다.
성령은 더불어를 원하신다.
혼자 튀지 말라.
혼자 뛰어나기 위해 일하지 말라.
함께의 하모니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가 없다.
성령의 가장 아름다운 사역 중 하나는
하나됨을 만드는 것이다.
용납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것이 성령의 일하시는 방법이다.
사울에게 직접 전부를 가르치고
성령을 충만케하고
사명을 주지 않은 이유를 기억해야한다.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을 완성해 가시는 성령의 일하시는 방법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혼자 살려고 달려가는 사람들,
혼자 잘 살아보려고 땀 흘리는 사람들,
성령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결과이다.
성령은 한 사람의 완성을 함께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신다.
함께한 아내,
함께한 사역자,
함께한 공동체의 지체들이 나의 완성의 마지막 한 조각이다.
성령은 그렇게 나를 완성하신다.
나의 아나니아,
나의 사울을 받아들여야한다.
그곳에 교회가 든든히 세워짐이 있고
나의 완성된 세움이 있다.
그래서 내 신앙의 수준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
어떤 사람은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하는 것은
아직 성령의 일하심을 완전히 알지 못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이다.
우리는 수 없이 아나니아와 사울을 만난다.
그러나 만날 수 없는 그 두 사람이 만나야
주님의 사명,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
주님의 목적은
내가 얼마나 사람을 받아 들이느냐에 있다.
내가 얼마나 사울 같은 사람을
아나니아 같은 사람을 용납하느냐에 있다.
그것이 주님의 의를 이루는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