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법 (행8:26-40)
영혼을 사랑하는 중요합니까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까?
교회가 중요합니까 성령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성령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내가 의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성령의 음성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까?
기억해야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것이 영혼을 사랑하든,
교회를 섬기든
사람을 살리든
의를 행하든 성령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교회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사람을 살리고
내가 의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내가 아닙니다.
나의 판단이 아닙니다.
나의 계산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루는 것은 오직 내가 주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성령께서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내 생각에
내 판단과 이성에 논리에
맞다고 생각되면 행합니다.
그 결과는 우리 입장에서는 성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두 가지 사건을 대치해서 기록합니다.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와 에디오피아 관리를 만난 사건입니다.
왜 두 사건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을까요?
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동시에 대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령이 어떻게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조종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앞서가고 우리가 따라가고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시몬의 문제는 성령은 자기가 조종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조정 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지만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합니다.
첫째, 여기를 떠나라는 것입니다.(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
성령은 늘 우리가 갈 바를 말씀합니다.
빌립의 입장에서 사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몬을 능가하는
능력으로 자신의 입지(?)를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으면 자신의 삶과 사역이 앞으로 놀랍게 펼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자를 통해 일어나 떠나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늘 우리를 그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게합니다.
성령의 음성은 늘 떠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향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습니다.
요셉에게도 떠나도록 했습니다.
모세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늘 떠남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이 땅은 떠나야 할 땅입니다.
오늘 내가 여기서 기적과 능력과 자신의 터를 잡아도
성령이 오시면 떠나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떠남이 목적입니다.
떠나야 성령이 일하십니다.
이 일을 통해 성령의 원리를 기억해야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거함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한 바를 위해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를 떠나게 하십니다.
보다 더 급한 곳으로
보다 더 시급한 곳으로 이끄시는 영입니다.
떠남이 목적이 아닙니다.
떠남의 원리를 기억해야합니다.
성령이 우리 삶에 순간 순간 원하는 것은
목적을 향해 이끄신 다는 것입니다.
나의 목적이 인생의 목적이 있고
지금 이루어야 할 시급한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성령은 에디오피아 관리를 그 장소에서
그 말씀을 읽는 타이밍에 빌립이 만나야 하기에
그에게 떠나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영혼,
내가 생각하는 교회.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에
여기 사마리아에 수 없이 있는데
이미 전도한 사람들
이미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판을 벌렸고
내가 길을 열었는데
내가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결국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시몬에게 말한 그대로입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고 아무리 소중한 일이어도
성령의 이끄심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빌립의 이끄심으로 한 나라에 복음이 전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알량한 자존심,
알량한 영혼에 대한 나의 욕심,
사람을 세운다는 나의 고집이
성령을 앞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떠난다는 말은
나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끄심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계획도 좋습니다.
내가 지금껏 하나님이 주신 원리와 말씀과
교회와 영혼이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을 이행하기 위한 성령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엡6:18)
성령의 음성은 늘 생명과 관련된 일입니다.
내가 아무리 영혼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사람을 위한다 한들
급하고 시급하며 촌각을 다투는 일이
우리 일상에는 수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영혼의 타이밍을 잘 아시는 주께서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남아공에서 집회하고 가시는데
비행기가 일반석이 없어 부득이 하게 일등석을 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떤 사람이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하더랍니다.
비행기 안에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이 싫고 불편한데
그 목사님 마음에 복음을 전하라는 마음이 너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그 사람에게 접근해서 나누어보니
중국의 고위 간부였습니다.
그 사람의 상태가 힘들어 이런 저런 마음으로 불평하며 가고 있었는데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마음에 세례를 주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행기 안인데요???
성령은 세례를 원하셨습니다.
물이 있으니 세례도 주었습니다.
이 사람을 언제 또 만나며 어떻게 중국에서 세례를 줄지 모르는데
성령은 그것을 아시고 복음을 전하고 세례까지 받도록
그 목사님의 마음을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나보다 더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떠나라는 음성,
성령의 모든 음성은 생명과 영혼과 관련된 역사입니다.
오직 따를 때,
오직 순종할 때 그 역사를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광야로 가는 것입니다. (26)
늘 성령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해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원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성령은 우리를 영혼으로 이끄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곳으로 이끄십니다.
광야로 가라고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곳에 마차를 타고 달려가는 에디오피아 관리가
이사야 말씀을 읽고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라는 죽음이 있는 곳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가라고 할 때는
나도 살리고 영혼도 살리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내 논리를 내려 놓는 것이 성령을 따르는 법입니다.
내 논리,
내 생각,
내 관습을 때로는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성령의 깊은 것을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논리, 내 생각, 내 이성적 판단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다만 들었다면 순종입니다.
문제는 들리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싶은데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지도 경험해 본적이 없고
어떻게 듣고 따르는지를 알지도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어야,
내 세상적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죽어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한자는 성령께서 음성을 명확하게 주십니다.
성령이 찾아오십니다.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내가 먼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에 나아가면 그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고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셋째, 성령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음성이 찾아오면 이상한 것은 명확하게 그것을 받은 사람은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일까 저것일까를 혼돈하지 않습니다.
명확하게 어떻게 살지,
명확하게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는지를 압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무시하고
내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나의 욕심과
나의 뜻과
나의 주인됨을 포기하지 않아서입니다.
더더욱
작은 성령의 음성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큰 뜻을 깨닫지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성령의 강한 음성은
작은 순종,
작은 자에게 행한 착한 행실을 통해
더욱 민감하게 느끼게 됩니다.
작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은 결코 인생의 큰 문제에 답을 주지 않습니다.
물론 큰 줄기를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큰 물줄기를 만나게 된 사람은
작은 것을 순종해야 하는 숙제가 남습니다.
상호 작용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오순절이 될때까지 날마다의 기도라는
작은 순종의 날들이 모여 성령의 능력,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기도의 순종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가르는 성령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앞에 자신의 작은 것을 순종한 사람만이
거룩한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큰 것만 노리십니까?
왜 큰 역사가 기도하십니까?
왜 내 인생의 놀라운 기적은 기도하면서
왜 오늘의 작은 성령의 음성은 무시하십니까?
작은 거짓말,
작은 불순종,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악함을 성령의 음성을 따라
포기하고 버리지 못하며
따르지 못하면
성령은 나라를 세우는 관리를 만나고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로마 황제를 만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작은 것에 순종한 사람에게
성령의 큰 음성도 듣게 하십니다.
성령의 음성을 좇아 작은 자에게 행한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좇아 큰 일을 이룰 일에도 참여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는 내가 이룬 큰 일, 작은 일이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음성에,
어떤 음성이든 내 생각에 작든 크든
다만 순종만이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
작은 음성에 따를 때 교회를 세우는 일이 일어납니다.
작은 음성에 따를 때 영혼을 세우는 일이 일어납니다.
작은 것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가 살아서입니다.
내가 주인되고
내가 아직 내 발의 신을 벗지 않아서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모세를 만나 하나님이 시킨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손에 지팡이를 던지는 것부터입니다.
손을 자기의 품에 넣는 것부터입니다.
그리고 강물을 떠다 붓는 것을 시킵니다.
엘리야에게 시킨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비가 오고 안오고
갈멜산에 불이 내리고 안내리고는
그냥 날마다 까마귀를 기다리는 작은 일부터입니다.
성령의 작은 음성이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사람에는
결코 하나님의 큰 일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 순종하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일입니다.
세상은 큰 것 하려고 시작된 세상입니다.
타락한 세상은 큰 것 하려고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하나님이 내 놓으신 해법은
<작은 것>입니다.
작은 것에 생명을 거는 것이 하나님의 해법입니다.
예수님이 큰 사람,
죽을 만하고
가치 있는 사람을 위해 죽었다고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나 같이 벌레같고
당신 같이 하찮고
발에 밟혀 죽어도 상관없을
작고 작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예수님,
하나님의 해법입니다.
십자가는 하찮은 나를 위한,
별 볼일 없는 작은 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 세상에 해법입니다.
하나님의 해법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작은 나를 위한 것이 해법이든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사는 법이
작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작은 생각,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논리,
성령이 주시는 작은 소자를 귀하게 여기며
성령의 작은 생각을 목숨처럼 여기는 것에 생명을 두셨습니다.
생명은 성령의 작은 음성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내 놓으신 하나님의 해법입니다.
하나님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답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큰 것만 좋아하고
놀랄만한 것만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만이
성령의 작은 것에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생명을 살리는 성령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지식으로
내가 내 열심으로
내가 내 수고와 이성과 판단으로
내가 내 땀으로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뭔가를 했다는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성령의 이끄심에 내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내가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뭔가를 해서 결과를 얻었다면
여지없이 우리는 왕이 되려합니다.
여지없이 우리는 주인 되려합니다.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의 일에 내가 참여하게 하시는 것은
다시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살지 못하게
주인으로 살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이중적인 섭리입니다.
오직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고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는 것만이
우리의 일입니다.
성령과 사는 법,
목숨 걸고 알아야 할 이 땅의 생존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