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의 싸움(행8:9-25)
사람들이 따른 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으면 오산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믿으면 착각입니다.
사람들이 낮은자부터 높은자까지 다 존경한다고 그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거기에
시몬이라는 마술을 행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마술을 행하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습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10)
세상은 능력을 원합니다.
세상은 힘을 원합니다.
세상은 기적을 원합니다.
다만 거기에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가 없을 뿐입니다.
시몬이 마술을 오랫동안 행하니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그를 따르니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줄 알았습니다.
무서운 것이 그것입니다.
능력을 행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사람들은 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고 따른 다는 것입니다.
능력을 원하는 세상,
기적을 원하는 세상,
힘을 원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숫자의 놀음에 마음이 가는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마음에 능력,
마음에 힘,
마음에 기적을 원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그것만 원합니다.
시몬이 사도가 성령 받기를 기도하자 성령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러자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줄테니
자기가 기도할 때 마다 성령이 임하게 해 달라고 원합니다.
베드로가 악함과 불의로 가득함을 회개하라고 합니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불의입니까?
성령은 세상의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세상의 높음과 기적과 능력과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
능력을 구하는 자는 능력과 함게 망합니다.
은을 구하고 금을 구한 자는 은과 금으로 망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로 정치를 했습니다.
이웃 나라와 협약을 맺고 정략결혼을 하면 나라가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지혜와 정치적 수단을 의지하자 그것으로 망했습니다.
자신이 구한 것으로 망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 세상의 논리 끝은 기적이고 능력이고 힘이고 숫자입니다.
숫자와 능력과 기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합니다.
이 논리,
힘의 논리,
숫자 논리,
능력의 논리를 십자가에 못박아야합니다.
시몬이 빌립을 통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는 믿었지만
자신의 평생 믿어왔던 논리들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논리와 힘의 논리와 기적의 논리를
버리지 않는 이상 그는 하나님의 성령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성령은 십자가를 지나야옵니다.
십자가를 지나다는 말은
자신이 믿어오던 자신의 논리를 말합니다.
육체의 논리를 말합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을 지탱해오던 세상적 논리를 십자가에 죽여야하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니
베드로를 통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말 한마디에 죽었습니다.
시몬도 베드로의 말 한마디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죽게 될 수 있습니다.
왜요?
예수를 믿지만 아직 자신의 논리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아서입니다.
성령은 결코 십자가를 지나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과 세상적 논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합니다.
열심으로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열심이 세상적 논리가 됩니다.
높은 자리를 향해 가는 사람이 높은 야망과 이상이
세상적 논리가 됩니다.
능력과 기적을 추구하면 살던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세상적 능력과 기적이 세상적 논리가 됩니다.
숫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숫자가 자신에게 세상적 논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열심도 능력도 기적도 숫자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중요하고 성령 안에는 그것이 다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령이 앞서 가시는 능력과 기적과 숫자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자신의 논리가 앞서가는 삶은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고 시몬이 되고 가롯 유다가 되는 것입니다.
시몬이 빌립을 따르고 예수를 믿는 곳에 있으나
그의 세상적 논리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고는
결코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이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못 박아야 할 세상적 논리는 무엇입니까?
높아짐이라면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세상은 높아지려다 망했습니다.
그 높아짐의 반대가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논리에 정반대되는 것이 복음의 논리입니다.
이전에 내가 믿던 세상의 논리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우리는 망하는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의 경고를 기억해야합니다.(20)
얼마나 열심히 예수를 믿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문제는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따랐느냐가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따랐던 시절의 문제는
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적 논리에 잡힌 그들의 생각입니다.
죽기로 각오 하지 않아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한 자신들의 논리입니다.
세상적 논리에 잡혀
십자가에 못박히지 못한 자신들의 논리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은
황제의 도시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이루어진 고백입니다.
그 고백에 예수님은 놀라운 칭찬을 하셨고 그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적 논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세상에 잡힌 나의 논리
힘의 논리,
능력의 논리,
열심의 논리,
땀의 논리를 죽여야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참 천국이 있습니다.
비교에 전부를 걸고
높아짐 인생을 걸고
능력을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시몬처럼
사람들의 시선과 집중을 받고 싶은
우리들의 세상적 논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정말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마음 뒤에 숨은
자신의 하나님 됨,
자신의 높아짐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성령을 핑게 삼아
하나님의 영광을 핑계 삼아 능력을 자기 손에
숫자의 많음으로 능력을 조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우리의 아담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시몬은 초대교회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논리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논리를 말합니다.
<사람의 논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 아니라
사람만 어떻게 하면 된다는 논리입니다.
사람이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일어났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상태가
<사람>이라는 이름입니다.
그 사람 속에 영원이 회복된 것은 성령이 임하는 순간입니다.
성령이 임했는데
아직 사람이 사람의 논리로 산다면 그는 영원히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흙이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 흙의 논리로 사는 것이 사람,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시몬입니다.
예수를 믿으나 세상의 논리,
높아짐의 논리,
능력의 논리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능력의 논리>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능력에 논리에 잡혀 자신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이끌고 가고 싶은 논리를 말합니다.
이끌림의 법칙이 아니라 이끄는,
자기가 능력의 주체가 되려는 논리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는 순간 삶과 인생과 역사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주인이 아닌 종으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
예수를 믿는 다는 고백입니다.
그때 떠났던 하나님의 신인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 되심은 철저히 하나님,
그리고 성령께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는 삶,
종의 삶을 사신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를 믿었지만
복음을 들었지만
그래서 빌립을 따르고 예배도 드리지만
죽이지 못한 세상의 논리인
주인의 논리에 잡혀
능력의 논리에 잡혀
능력을 구하고
성령을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악하고 불의한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새 논리입니다.
망해가는 세상에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의 논리>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반대는 능력의 논리입니다.
십자가의 반대는 주인의 논리입니다.
아담을 유혹한 사단은 능력을 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이 준 것은 <세상적 논리>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지 않은 나의 논리는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은 나의 육체와 세상적 논리 속에
생명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영원이 꽃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놀라운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초라한 삶일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생기가
그곳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곳에 하나님의 위로가
그곳에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것들이
죽은 고목에 꽃이 피듯
죽은 세상의 논리 속에
생명의 꽃이 피기를 기도합니다.
* 아빠와 막내 수빈(사진: 서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