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유지하는 비결(행5:12-32)
성령을 경험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그 능력을 유지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고난입니다.
광야적 삶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능력이 나타나면서 우리에게 생기는 문제는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고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때 가졌던 순수함과 고난이
점점 내 생활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위치가 올라가고 나의 이름과 명성이 올라가면
결국 대접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접을 받는 자리에 올라갑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은 대우하는대로 버릇이 듭니다.
잘 대해주면 자꾸 버릇이 없어집니다.
육체가 그렇습니다.
대우하면 할수록 육체의 소욕을 채우고 싶습니다.
성령은 세상에서 고난 받는 하나님의 백성,
미움 받는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보혜사입니다.
돕는자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사라지니 성령의 도움도 사라집니다.
고난이 없고
핍박이 없으니 능력은 당연히 사라집니다.
사도들이 지속적으로 성령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이유는
지속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가 응답되고
삶의 형편이 나아지고
물질의 풍요가 오면 그것이 복일것 같지만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가장 번창할 때 망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가장 좋은 시기에 하나님을 떠났고
가장 좋은 시절을 보내던 다윗이 망했고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던 솔로몬이 망했습니다.
고난이 사라진 교회와 사람은 성령안에 머물지 못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채우느라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지 못합니다.
편한 것이 나쁜것은 아니지만
편하기 때문에 성령안에 머물기 위해 더 없은 자기 훈련을 해야합니다.
성령의 은혜의 지속성은
고난의 지속성에 비례합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속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가지 이유로 성령이 역사합니다.
기적의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 전해질 때입니다.
삶의 목적이 생명의 말씀일 때 가능합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20)
사도들이 복음 전하고 기적을 해하고 표적과 기사를 많이 행하다 또 잡혔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감옥에서 자는데 천사가 급히 깨워 옥문을 열고 나가라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새벽부터 성전에서 전합니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21)
성령의 능력의 목적이 무엇인지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에게 권위를 주고
우리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고
삶을 유지시키는 목적을 기억해야합니다.
기적의 목적이 무엇인지 마음에 심어야합니다.
오직 한가지입니다.
새벽부터 전해야 할 이유는 오직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힘쓰라고 하십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4:2]
말씀 전파의 목적이 없는 기적의 구함은 다 가짜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에게 일어난 천사들을 통한 기적이나
사도들을 통해 일어나 표적과 기사는 다 한가지 이유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그 뜻을 알고 그들은 새벽부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또 잡힙니다.
대제사장과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결론적으로 한마디 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해야 하느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느냐? "(29)
그러면서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역사하는지 그 비결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32 )
성령을 받는 조건은
둘째, 증인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세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목적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증인의 삶과 순종의 삶의 환경은 뭔가요?
고난입니다.
미움입니다.
하나님의 길,
성령의 길은 세상에서 오직 고난이고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편해지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편하고
내 것을 손해보고
희생해야 가능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말 잘하는 목사치고
설교 잘하는 목사치고
이름이 높아지는 사람치고
손해보려 하지 않습니다.
계산은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계산이 빨라야합니다.
그러나 계산은 자기 것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해보기 위해서 빨라야합니다.
고난,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이 지속적으로 역사하지 못합니다.
편안한 것을 구하고
내가 손해보지 않으려는 심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마음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이,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이 땅이 다가 아님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이
더 이 세상적이고
더 세상의 것에
편안한 것에
자기 손해보지 않으려는 것에 계산이 빠르다면
누가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누가 그 사람이 전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겠습니까?
말과 삶이 다르다는 것을 그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좀 모자라기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좀 어리석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믿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을 믿는 사람이
저 하늘이 없는 것처럼 산다면
그 말을 누가 믿고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과 사도들의 말을 믿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그들이 한결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잡혀가도 매를 맞아도
그들은 자기가 믿는바 대로 살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섬기라 하면서 섬김을 받으려하고
나누라 하면서도 잡으려하고
낮아지라 하면서도 더 높은 자리를 욕심내고
고난을 받으라 하면서도
고난을 제일 먼저 도망가는 그런 목사를 사역자를 성도를
누가 믿겠습니까?
성령이 역사하는 틀은 고난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입니다.
아픔입니다.
슬픔입니다.
외로움입니다.
그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믿는 자는 고난도 함께 받는다,
믿는 자는 고난이 당연하다 여기는 사람입니다.
믿으면서 고난을 피하고
믿으면서 불편함을 피하고
믿으면서 희생하지 않으려는 심보는
믿음을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려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거짓 선지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아픔입니다.
몇일 째 하나님은 저의 약함을 보게하십니다.
죽겠다고 선교사로 와서는
편한 것에 머물고 싶고
좀더 편한 곳에 시선을 머무는 나를 향한 책망입니다.
고난이 아니라 칭송을 먼저 바라고
희생이 아니라 존경을 바라고
낮아짐이 아니라 높아지고 싶은 마음으로 사는 나를 향한 책망입니다.
그래서 제가 광야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있는 모양입니다.
세상을 보기 전에 나를 보는 훈련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 나를 먼저 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의 실체를 모르면서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려는 나의 약함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아픔입니다.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교회를 향한
믿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아타까움의 마음이 오늘도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편하면
그러면서도 애써 그 마음에서 도망가려는 나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의 가장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 한가운데로 이끄심을 알기에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용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에 수 없이 아픔과 고난속에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외로움과 처절한 아픔의 현장을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아픔의 마음으로 오늘도 눈물입니다.
위로하고 싶고
함께 하고 싶고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은 나의 눈물의 이유를 하나님이 알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자가,
죄로 태어나 죄 중에 지내는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아픔의 인생들을 위로하는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작은 자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한 페이스북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를 함께 나눕니다.
어제도 오늘도 하나님은 나에게 울라 하십니다.
내가 힘을 줄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힘이 없어서 입니다.
그러나 힘이 없을 때 말벗이 되고 길 동무가 되고
같은 곳을 보고 갈수는 있습니다.
내가 위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나도 같은 세상에 같은 아픔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이 당하는 힘듦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공감할 수는 있습니다.
나도 그 아픔, 그 답답함,
그 힘듦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이해하고
그 말의 의미를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길이 되지는 못합니다.
나도 종종 길을 잃고 헤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이 길을 잃을 때 아니 나조차도 길을 잃을 때
같이 찾아 가는 길동무가 될 수는 있습니다.
길이 아니어서 나를 찾아오라 말은 못하지만
잃은 길
보이지 않는 길에
보이는 길동무가 될 수는 있습니다.
내가 기도의 응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간구에
하나님을 향한 간구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에
함께 울고 함께 울 수 있습니다.
내가 힘도,
위로도,
길도,
응답도 되지 못하지만
이 세상에서 함께 가는 친구는 될 수 있습니다.
어렵고
두렵고
외롭고
폭풍 치는 세상이지만
당신이 당하는 세상에서의 마음을 알기에
함께 걸을 수는 있습니다.
당신이 보낸 위로라는 말에
용기 내어
'함께'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 사진: 서은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