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찌합니까!(행5:12-11)
좋은 말을 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올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생각의 한계입니다.
이성의 한계, 합리의 한계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이성과 합리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하는 곳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베드로가 하는 아니니아와 삽비라부부에게 한 말은
믿음으로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부부도 위해야합니다.
목사의 입장도 교회의 입장도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헌금 잘했다 해야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부의 입장도,
베드로의 목회자적 입장도
교회의 입장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성령의 입장을 전달합니다.
성도를 위하는 것은
목사가 욕심이 없어야합니다.
말씀과 삶이 같이 가는 목사여야합니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목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사람을 대하고
사람 중심의 목회를 합니다.
목사와 사역자는 그들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
성령의 입장을 말해야합니다.
사람에게 욕을 먹어도 성령이 기뻐하시는 길,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야 그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걱정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나를 싫어 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할 것이다.
맞습니다.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바른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말,
성령의 관점을 말해야합니다.
베드로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서야 하는 성도가
사람 앞에 서려는 삶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고
사람에게 거짓 말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합니다.
목사가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개인적인 가짐이나 나눔은 그 다음입니다.
성도를 세울 때 거룩하지 않은데
하나님 앞에 문제가 있는데
그 사람 눈치를 보고
헌금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위치가 있기 때문에 할 말을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할 말을 못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세우고 싶은 욕심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그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관점에서 말하고
성령의 관점에서 말해야합니다.
결과도 주님이 만드십니다.
그것이 목회자가 욕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게,
사람의 숫자에,
사람의 헌금에 욕심이 생기면
할 말을 못하게 됩니다.
사람이 가장 욕심에 매이는 것의 상징은 물질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첫 시험은 물질로 왔습니다.
자칫 하면 베드로도 넘어갈 일입니다.
사람보기에 괜찮지만 만약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베드로가 눈감아 주었다면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심판의 결과는 이상합니다.
헌금하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교회로 안 와야 하는데
온 사람들도 떠나야 하는데
사람들이 더 몰려옵니다.
사람들이 더 사도들을 두려워합니다.
헌금을 내고도 두려워합니다.
백성들이 칭송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령 앞에서 행하는 사람들,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사람들이 나를 고려하고
이해하고 할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식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해야합니다.
그것이 가장 길게 교회게 세워지고 존재하는 길입니다.
좋은 말만 하는 목사는 위험합니다.
듣기 좋은 말,
복 받는 말만 하는 목사는 결국 교회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는 것을 가로막게 됩니다.
복을 못받고
인기가 없어도
하나님의 말을 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것을 포기하면
당장 자기 교회는 사람이 모이지만
결국 교회는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복받고
저렇게 하면 자녀가 잘되고
그것을 가르치는 목사는 아니나아와 삽비라가 찾아 왔을 때
눈 감아주는 목사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넘어가는 목사입니다.
성령이 보여주시면
성령이 알게 하시면 바른 삶을 가르치는 목사가 바른 목사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 못됐다 말해주는 목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목사입니다.
베드로는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회복의 시간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는 것은 본인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고 돌이키면 구원입니다.
그러나 거부하면 아픔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사역하기 전에 십 여 년을 돌아왔습니다.
아픔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아픔을 가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성령의 음성,
성령의 뜻입니다.
성도의 거룩성,
목회자의 거룩성,
교회의 거룩성은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입장,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장 아픔이지만
그것이 바른 길이면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배워야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회를 부흥케 하는 비결입니다.
사람 눈치 보면 당장 좋아도
결국 올무가 됩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목회자를 종종 만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목회하려다 결국 교회에 어려움을 당하는 수 많은
사역자들이 이 땅에 너무 많습니다.
힘들어도
바르게 길을 트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세우고
사역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합니다.
교회를 빨리 성장 시키고
사람을 빨리 모으려는 사람이 이 문제의 올무에 빠집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교회의 순수성,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것은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결국 모두를 살리고 세운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좋아서 잘해주면 결국 부모를 죽이는 자가 됩니다.
교회를 망하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됩니다.
틀린것은 틀리다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고
매를 들 때는 매를 들고 가르쳐야 아이가 바르게 자랍니다.
좋아서,
사랑해서라는 명목으로
당장 이 순간을 넘기면 아이는 망합니다.
당장 아파도 사람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정확한 말과
정직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전제는
욕심이 없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자기 희생이 있는 사람이어야합니다.
그런 사람의 말속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문제는 욕심도 있고
자기만 사랑하고
영혼보다 육체에 관심이 많고
희생도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은 결국 상처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모든 회복의 시작은
베드로와 같은 성령 안에 거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순결하고 순수한 사역자의 부재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저의 아픔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다 저의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시대의 아픔은 다 저의 부족함입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고
성령의 음성을 전할 자격과 깨끗한 그릇이 되지 못함입니다.
오늘은
베드로 같은 사역자가 되기를 원했는데
돌아보니
성령을 속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삶을 산 것 같아
아픔입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주여 어찌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