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 그리고 디딤돌 (행4:1-21)
믿는 자가 오천이나 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가십니까 아니면
사도들이 잡혔다는 것에 마음이 가십니까?
저는 오천이 아니라 사도들의 잡힌 것이 마음에 쓰입니다.
이유는 오천은 주님의 일이고
잡힌 것은 사도들이 할 일을 하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과 주님이 할 일에 대해서 혼돈합니다.
주님이 할 일을 우리가 마음을 졸이고
우리가 할 일을 하지 안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천은 주님의 일이고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사도들이 잡힌 것입니다.
왜 잡혔을까요?
세상은 체질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가 싫은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면 반드시 회복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회복은 세상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체질적으로 싫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싫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압니다.
예수의 이름을 빼고 우리가 뭔가를 하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똑 같은 일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면 무조건 싫습니다.
왜 세상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고 전하면 싫어 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이 들통이 나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주님이 있으니 사두개인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이 들통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이 싫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실은
우리가 틀렸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못살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길을 가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숨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싫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혹 내가 틀린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내가 살아온 것이 잘 못된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닌지
살아온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말하면 안됩니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말해야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다른 것이 더해지는 것,
그것이 틀린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빼고 내 힘,
내 능력,
내 노력,
내 열매,
내 결과를 말하면 그것이 틀린 것입니다.
그냥 나를 빼야합니다.
나를 말하지 말아야합니다.
나의 약함을 말하고
나의 열매를 말하지 말아야합니다.
오천명은 주님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종종
그 숫자가 나의 숫자인양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입니다.
인간 범죄의 본성은 높아짐이라 했습니다.
<상향성>이라 했습니다.
숫자는 사람을 상향성으로 이끄는 가장 대표적 모습입니다.
숫자가 사람을 틀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숫자로 자신의 의로움과 맞음을 증명하려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늘 조심 할 것은
주님의 열매로 나의 상향성을 대치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상향성의 열매 앞에 고난이라는
<감옥>을 허락하십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잡히지 않게
눈을 멀어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으신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철저히 우리에게 상향성이 아니라
하향성의 자세를 잊지 않도록하십니다.
또한 세상에서 복음은 철저히 하향성의 자세를 가져야
복음이 복음다워집니다.
소금과 빛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녹이든지
자신을 태우든지입니다.
녹이지도 태우지도 않는 존재는 늘 상향성을 추구합니다.
자신을 녹이고 자신을 태운다는 의미는
하향성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을 말하고
그 하향성 속에 복음의 본질이 존재합니다.
하향성의 의미는
사도들에게 감옥을 각오하고 말씀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향성의 삶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늘 세상처럼 상향성의 삶을 추구하는 곳에는
주님의 열매인 <오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이 친히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향성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속성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 본질은 녹아짐과 태움입니다.
물론 빛은 우리 안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빛의 빛됨은 착한 행실,
세상과 반대의 하향성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감옥에 해당하는 하향성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20)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사람은
본 사람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듣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직 본 사람,
오직 들은 사람만 전하는 것이
<예수의 이름>입니다.
본 것처럼 살 수는 있습니다.
들은 것처럼 흉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향성의 삶,
감옥을 함께 허락하십니다.
진짜와 가짜는 상향성이냐 하향성이냐로 구분됩니다.
자꾸 높아지려하십니까?
자꾸 오천에만 마음이 가십니까?
감옥이라도 기쁘십니까?
낮아지는 것이 즐거우십니까?
높아짐과 낮아짐,
상향성과 하향성의 자리,
어디가 우리의 자리라고 여기십니까?
사도들의 말에 오천이 돌아오고
수 많은 영혼들이 세워지는 것은
그들의 하향성의 삶이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향성의 삶이 없는 외침과
낮아짐의 삶이 없는 설교와
녹아지고 태워지는 삶이 없는 삶은
오천을 향한 주님의 역사에 걸림이 될 뿐입니다.
걸림돌로 사시렵니까 아니면
디딤돌로 사시렵니까?
주님이 나를 밟고 가야하는데
내가 주님을 밟고 높아지려 하는 우리입니다.
걸림돌과 디딤돌은 같은 돌이지만
전혀 반대의 돌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건축자의 버릴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
주님이 걸으시는
성령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에
디딤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어도 걸림돌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디딤돌은 상향성이 아니라
하향성의 삶,
녹아지는 소금으로
자신을 태우는 빛으로 살 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나의 친구 여러분!
함께 기쁨으로 녹아지고 태워지는
거룩한 디딤돌의 삶으로
주의 이름이 높아지는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