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상관 있는 사람들 (행2:42-47)
인간을 다시 살리는 방법은
죽음과 하나님의 신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죽음이 죽음 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죽음을 죽음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 상관이 있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오직 믿음입니다.
일이 일을 하지 않고 오직 믿음이 일을 합니다.
오늘 믿음의 사람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변한 한가지는
믿음입니다.
성령을 받고 믿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니 기도하고 기도하니 성령이 임합니다.
기도의 전제는 믿음이고
성령의 전제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가 사람을 떠난 하나님의 신인 성령을 일하게합니다.
그 믿음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입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이나 하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습니다.
다른 것을 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을 다른 것에 걸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에 걸어야합니다.
베드로의 성령 받은 후 전한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내가 예수를 죽였고 회개하여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삼천명이 돌아온 것은 기적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전하는 자의 믿음이 어떤가가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말로만 듣던 사실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만큼 믿음이 강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씀을 전하니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여십니다.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기도한 것이 아니고
기도하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기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로 인도하고 기도는 <성령>으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영혼을 <구원>하는 길로 인도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길입니다.
왜 기도 하지않는가?
믿지 않아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니 믿음의 대상이 달라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믿음,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설령 예수님이 보여도 잠깐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보고 의심하여 바다에 빠집니다.
믿는 사람만 기도합니다.
기도한 사람만 성령 안에 거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빼고 다 합니다.
그 말은 믿음 없이 전부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다는 것은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기도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저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오직 달라는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기도의 끝은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삼천이든 삼십이든 결과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없음으로 인한 기도하지 않음을
책망하십니다.
믿음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한 유일한 예수님의 책망은 믿음 없음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4:40]
그리고 베드로를 향한 기도도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눅22:32]
기도도 성령도 구원도 오직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인도하고
성령의 역사는 영혼의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증거의 영이라 했습니다. (증거의 법칙)
성령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내가 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일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강하게 일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길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성령의 증거로 인도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그들이 성령이 임해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서 기도했습니다.
다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기다림의 전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만이 기도 안에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기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기도하고
내가 일하려 합니다.
내가 먼저 말하려합니다.
내가 먼저 뛰어 나가려합니다.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이 일하게 해야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
일하게 하심을 따라 일해야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내어드림이라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는 전제는 기도인데
기도의 전제는 우리 자신을 내어드림입니다.
성령이 임했다고 다시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일하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아버지와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이끄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끄심의 법칙)
성령이 임했다고 결코 자기 스스로 일하고
자기 스스로 삶과 사역을 주도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나와 상관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받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죄와 상관이 있고
나의 허물과 상관이 있고
나의 악함과 상관이 있다고 믿고
베드로의 말처럼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나와 상관 있다고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나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구원을 회개를 지나야합니다.
구원은 죄의 고백을 지나야합니다.
죄의 고백,
회개를 지나지 않는 구원은 없습니다.
믿음의 전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전제가 없이는 구원이 구원이 아닙니다.
나의 죄의 고백,
죄인이라는 인식이 없는 신앙생활은 나를
하나님처럼 살게 하는 도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죄의 고백을 자나야 옵니다.
내가 죄인임을 믿어야 하나님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믿어집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내가 죄인임에 대한 인식이 사라집니다.
성령의 소욕의 반대는 육체의 소욕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강한 시대일 수록
성령의 일하심은 적어집니다.
육체의 소욕이 흥왕한 시대입니다.
성령이 일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도는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는 힘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도 기도에 힘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는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겠다는 하나님께 보이는 유일한 증표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직 내 힘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이 남은 사람은 아직 십자가에 죽었음을 믿음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령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내 자아가 십자가에 완전히 죽은 사람에게만 역사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복음,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상관있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죽었다고 고백하는 사람,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죽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사람입니까?
이 자리에 없다면
하나님의 마지막 대안인 성령과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역사하지 않으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성령으로만 전해집니다.
성령과 상관없는 삶,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록 나는 약하나 ,
비록 나는 힘이 없으나
비록 나는 문제가 많으나
성령께 이끌리는 삶,
그것만이 하나님의 답입니다.
성령과 상관 있는 삶과 사람들.
하나님의 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