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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설 2편

하나님의 역설 2편

 

 

 

 

 

 

 

 

 

 

 

 

 

하나님의 역설 2

 

 

사단이 어떤 말로 유혹했고

앞으로 세상이 어떤 논리와 원리로 역사가 진행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사단이 가지 말이 세상 역사를 예견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사람을 유혹했나?

 

 

 

첫째는 죽지 않는다 했다.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인류의 역사는 죽지 않으려는 인간의 역사를 보여준다.

인간은 영생불사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나오고 죽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심으로 살게 된다.

 

 

모든 불교가 그렇다.

성불해서 부처가 되어 영생의 삶을 추구한다.

인류는 수없이 죽지 않으려고 연구하고 노력하고 수고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순간부터 이미 죽은 자들이고

죽어가는 상태이다.

 

 

둘째는 눈이 밝아진다 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원어로 보면 눈이 뜨인다 했다.

눈이 열린다 했다.

눈이 열리는 일이 인류역사에 있게 된다.

 

 

바로 이성주의,

합리주의 ,

개몽주의 등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넘어진 것이 뭔가?

정탐꾼과 이스라엘의 실수가 무엇인가?

바로 이성과 합리이다.

어느 길로 가면 좋을지, 어느 성으로 가면 좋을지 찾아 보자는 것이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모르던 어떤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모르던 길을 한번 가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는 길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글을 모르던 아이가 글을 익히면 안보이던 글자들이 눈에 들어와 눈이 뜨이는 것이다.

 

 

 

인류는 이성과 합리로 인해 믿음의 길이 막혀버리게 된다.

어설픈 과학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 눈이 열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악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선은 오직 하나님을 택함이 선이다.

하나님 자체가 선이시다.

하나님을 선택함이 선이다.

악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택하지 않는 모든 것이 악이다.

죄는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빗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죄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모든 죄와 악의 시작이다.

 

 

인간은 하나님만 택하던 존재에서 이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택하므로 악이 존재하게 된다.

 

 

선악을 아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닌 것에 눈이 열려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택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하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이유가 아니라 다른 어떤 이유,

나의 어떤 것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하는 모든 것이 악이다.

 

 

우주만물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을 선택함이 선이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택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하나님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 했다.

 

 

[막10:18]~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인간이 눈이 밝아져 이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인간의 기준이 되어 선이 아닌 악을 택하는 존재가 것을 사단은 말했다.

 

 

 

셋째는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된다고 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앞으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한다는 것을 말한다.

 

 

범신론적 합일주의를 말한다.

모든 불교의 뿌리이다.

어떤 궁극의 에너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이다.

모든 신비주의와 모든 종교의 바탕에는 해탈을 하며

도를 깨침을 통해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하나님처럼 됨을 설득한다.

비단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스스로 힘을 가졌다 생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려한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계획하고 생각하고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인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아 보려 하는 것이다.

 

 

 

 

인간은 배가 부르면 왕이 것처럼 교만하고

인간은 돈이 생기면 뭐든지 있다 여기고

인간은 권력이 주어지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착각한다.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려한다.

 

 

넷째, 선악을 알게 된다 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좋고 나쁨을 안다.

율법주의, 인본주의, 도덕주의 등이 나온다는 말이다.

 

 

선악을 안다는 말은 좋고 나쁨을 안다는 것인데

선악의 본질은 하나님을 택하고 택하지 않음인데

인간은 하나님을 빼고 스스로 좋고 나쁨을 기준 삼는다.

그래서 율법주의가 나오고

도덕주의가 나오고

인본주의가 나오게 된다.

 

 

얼마나 율법을 지켰느냐로 선하다 악하다로 구분하는 오류를 범한다.

기독교는 얼마나 율법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느냐로 구원받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도덕종교가 아니다.

율법의 정도에 따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택하느냐 오직 믿음을 택하느냐로 결정되어 지는 것이다.

 

 

 

창세기에 인간을 찾아온 사단은 앞으로

자신의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지를

자신의 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자신의 나라를

구해도 얻지 못하는 영생불사의 종교로

믿음이 아닌 합리와 이성으로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흉내 내며

하나님처럼 군림하고 것을 보여주고

힘이면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치 있을 것처럼 살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유일한 선악은 하나님을 택하느냐 택하지 않느냐인데

그것을 오해하여 율법주의와 도덕주의로 인간을 끊임없이 율법의 짐을 지워서

인간으로 고통하고 갈등하고 번뇌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사단이 인간에게 말한 자신의 세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4장에서

인류의 역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가인과 아벨 사건을 통해서

그리고 라멕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역설이 나온다.

 

창조와 인류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에 의해서 지어졌다.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정복하며 통치하는 것이다.

힘에 순복하며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고 통치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데 사단이 힘을 오로지 자시의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하고

모든 것을 빼앗았다.

 

 

 

무엇이 하나님의 역설인가?

 

 

앞으로 인류의 구원,

하나님의 원리는

권력이나 힘이 아닌 겸손과 낮음으로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심판 받을 밖에 없는 인류를 용서로 세상을 바꾸시겠다는 것이다.

 

 

 

상징이 가죽 옷이다.

힘이 아니라 죽음으로 세상의 원리를 바꾸시겠다는 것이다.

높음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권력이 아니라 소자를 소중이 여기는 나라로

사단이 가졌던 세상의 왕관이 아니라

저주받은 십자가의 면류관으로

세상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원칙과 법칙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세상은 사단이 잡은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빼앗긴 세상은

힘의 법칙,

높음의 법칙,

강함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나,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는 나라는

 

힘이 아니라 겸손으로

높음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강함이 아니라 한없이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 의해서

다시 세우실 것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본성은 에덴동산 이후부터 법칙에 의해 유전자 배열이 되어있다.

세상은 자꾸만 높아지려는 것이 자연스럽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이 새롭게 세우신 나라에서는

법칙이 절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칙들은 모두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단이 절대 가질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심어 놓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결코 이해되지도

설명되지도,

용납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세상의 영은 세상의 권세 잡은 자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에 데려다 성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데려가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었다.

 

 

 

[마4: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4: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그게 가능한가?

 

 

세상의 꼭대기와 세상의 높은 곳은 마귀가 가진

마귀가 자기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곳에 데려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에 결국 믿음을 저버린 것이다.

 

 

세상은 욕심,

높아지고 많이 가지고 군림하려는 욕심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사단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시험하였으나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와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법칙을 너무나 알고

원리와 법칙을 몸소 보이시고 세상에 심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에

마음을 지키시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되신 것이다.

 

 

세상은 살기 위해 열심히 살지만

하나님 나라는 죽어야 산다.

 

 

[마10: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래서 원리의 열매,

원리의 모범이 예수님이다.

 

 

[마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마귀는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을 믿고

죽지 않기 위해서 사는 인생들을 향하여

죽어야 산다고 하나님의 역설을 말씀하신다.

 

 

[눅17: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사단의 말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했다.

죽음을 위해 목숨을 인류가

이제는 죽어야 영생을 얻도록 원리를 바꾸신 것이다.

 

 

 

이것이  사단의 번째 말에 대한 하나님의 역설이다.

 

 

나를 죽여야,

나의 욕심, 나의 힘을 향한 노력,

율법을 지키려는 짐을 내려 놓을

거기에 생명이 있도록 하나님은 사단의 논리에 역설의 법칙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사단은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사람을 이용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죽이기로 하셨다.

 

 

[요10: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가짐이 아니라 버려야 이제는 얻어지도록 하셨다.

세상의 법칙을 완전히 뒤바꾸는 일대 혁명,

일대 역전,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놓을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다.

 

 

 

[요10: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셨는가?

 

위대한

< 창조의 역사 > ,

 

< 하나님의 역설 > 만드는

하나님의 원리를

몸소 열매로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한없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셨다.

 

 

사단은 목숨을 걸고 힘을 가지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잡으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원리는 살기 위해 이제는 죽어야 되는 법칙을 만드셨다.

 

 

법칙을 만드셨는가?

세상의 영은 결코 수를 가질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은 잡으려는 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버리는 영이다.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없다.

 

 

 

[눅14:33]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

예수님을 따른 자들의 새로운 법칙이 것이다.

 

 

가지려는 세상과 버리는 제자들!

 

 

싸움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니 버리지 못하고 잡으려는 사람들과 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싸움인 것이다.

 

 

하나님은 가능하면 버리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런데 세상에 속해버린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DNA구조 때문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싸우시고

성령의 말할 없는 탄식이 날마다 그분의 보좌 앞에 울려 퍼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통해

분의 역설의 원리를 그러내실 때는

먼저 그분의 원리를 심기 전에 세상의 원리를 버려야하는데

 

버림의 시간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는 사는 곳이 아니라 내가 죽는 곳이다.

죽어야 살기에 하나님은 광야를 허락하신다.

 

하나님도 아파하시는 자녀들의 아픔을 허락하시고

아픔의 눈물의 대가를 통해

세상의 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체득하는 것이다.

 

 

 

세상은 죽지 않기 위해 산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산다.

 

 

모든 생각과 경험과 뜻을 죽여야 우리는 살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 번째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