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음의 법칙(행12:1-13)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열정, 나의 열심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나를 능가하는 어떤 힘입니다.
그 힘을 못 이겨 내가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끌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시든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의 열정이 말하게 하십니다.
내 안에서 성령이 나를 통해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의 의미는 내 안에
나를 능가하는 복음 전함의 열정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각 사람의 머리 위에 하나씩 임하는 것입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3)
하나님은 성령을 각 사람에게 보내십니다.
이유는 첫째,
각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 되어야합니다.
성령이 임한 다는 것은 사명의 회복입니다.
사명은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은 영원을 소유하고
영원이 된 사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여 영원이 되고
영원이 된 사람은 당연히 사명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는 곳에는 죄의 해결이 나타나고
그리고 천국의 소망이 확증되며
사명의 열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나타나는 현상은 이끄심이고
이끄심이 있기 전에 들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생기가 내 안에 들어온 증거는
자꾸 복음,
예수님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이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단지 성령이 말하고 싶은 것을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내가 충만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 최고의 상태는 성령이 하고 싶은대로
나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어 드림입니다.
기도가 내어 드림의 기초라 했습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은
나를 내어드리는 상태가 될 때 가능합니다.
각 사람에게 임한 성령은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개인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 즉 사명의 완수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각 개인에게 떠난 하나님의 신이 돌아옴으로
개인의 영원의 회복이며
개인의 사명의 회복입니다.
사명의 의미는 하나님을 증거하며
세상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성령은 나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성령이 임재할 때 내 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방언의 충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냄의 충만입니다.
그것이 방언을 받고 한 것은 방언이 아니라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11)
하나님의 큰 일입니다.
그 큰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며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를 전하는 영입니다.
하나님을 전하는 영입니다.
단지 나를 빌려서 말할 뿐입니다.
성령은 이중적 사역을 하십니다.
개인의구원과 그 개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그 본질은 예수를 증거함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합니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야합니다.
내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말하고 싶은 충만으로 이끌어야합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원래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짓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명의 수행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해 내는 것이 사명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님의 영광도
하나님의 뜻도 사라졌습니다.
성령이 임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뜻이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의 열심을 내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 가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의 말하심을 내가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법칙은 들음입니다.
들은 것을 전하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가장 성령에 충만한 사역입니다.
그것은 들은 것을 말하는 사역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성령의 법칙 들음의 법칙입니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성령의 법칙 1- 들음의 법칙
큰 축복일수록 오래 걸린다.
축복이 클수록 가는 길이 험하다.
진정한 축복이란 물질의 풍요도 일이 잘 풀림도 아니다.
진정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쓰심이다.
물질을 얻음,
잘사는 것이 축복의 한 종류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쓰심이다.
아브라함은 45년이 걸려서야 축복의 확증을 보았다.
그러나 그 걸음은 오랜 시간을 통해서 찾아왔고,
그 걸음은 전 삶을 걸어야 하는 순간을 몇 번 지나야 했다.
모세의 축복은 40년이 걸려서야 시작이 되었고,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한 축복의 사람이 되기 위해
인류 역사 이후 수 천 년을 지나야 하는
인내를 거쳤다.
가장 큰 축복은 오랜 인내와 수고와 기다림을 통해서
그리고 큰 축복일수록 많은 아픔을 지나야 오는 것이다.
축복은 사람을 통해서 온다.
내가 사람을 남길 때 하나님은 나를 그분 앞에 남긴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다른 사람을 세울 때 하나님은 동일하게 나를 축복한다.
고아와 과부에게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라 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빚을 지는 것이라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는 방편으로 다른 사람을 보게 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움으로
나의 축복의 길을 여시는 분이다.
모두 축복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나
공의의 하나님은 마귀에게 나를 축복하는 이유를 보여줘야 한다.
이유 없는 축복은 없다.
내가 축복의 이유를 가질 때
하나님은 당당하게 나를 축복하신다.
보란 듯이 마귀 앞에서 나를 축복하고 또 축복하신다.
악인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베푸시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때 작은 것에 충성했다고 말씀하셨다.
결코 큰일을 잘 했다고 말한적이 없다.
큰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는 작은 일하는 사람이다.
작은 일 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사로 부르심이 축복이다.
그래서 부르심은 축복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심!
모세를 부르심!
열 두 제자를 부르심은 곧 축복이다.
부르심은 아픔을 수반한다.
부르심은 가치에 따라 큰 아픔과 큰 인내가 있을뿐
그분의 부르심에 맞는 시간을 지나
반드시 축복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부르심은 곧 쓰심이고
쓰심이 진정한 축복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축복의 사람은 작은 것에 충성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큰 사람으로 인정할 뿐이지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은 나를 인정하신다.
천국은 작은 것을 잘 할 때 온다.
왜 아내를 주셨나?
아내는 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작은 것에 만족함을 누린다.
작은 배려와 사랑의 손길이 위대한 아내를 만든다.
작은 수고들이 아내를 행복하게 한다.
그 행복이 곧 천국이다.
사람이 큰 일에 맘 상하지 않는다.
작은 것에 맘 상한다.
큰 것은 잘 한다.
큰 도움도 주고,
큰 위로도 되고,
큰 일에는 강한 것이다.
그런데 큰 일을 잘하더라도
작은 일에 배려와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맘이 상한다.
그 작은 상함이 곧 사람과 전체 공동체를 망하게 한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
그 큰 이스라엘도 작은 누룩 같은 한 사람의 욕심이
온 백성을 망하게 한 것 같이
내 작은 행동 하나가 하나님이 충성된 종으로 인정하게도 하고
내 작은 것이 온 사람과 교회와 천국을 아프게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칭찬할 때
네가 크고 놀라운 일을 잘하였도다 라고 하지 않고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라고 말씀하신다.
[마25:21]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충성은 작은 일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무슨 큰 일을 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결코 큰 일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단지 큰 일을 볼 것이라 했다.
[요5:20]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우리의 일은 작은 일이다.
큰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 것은 작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다.
[마5: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성경은 우리에게 작은 것에 충성하고
작은 것을 인내하고 충성할 때 그것이 천국에서 큰 것이라 하신다.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처럼 사는 것!
작은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
그것이 축복의 자리이다.
계명은 구약에서는 율법이지만,
성령 시대에서는 내 안에 성령께서 주시는 작은 음성을 말한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법이다.
[롬8: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람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하였는데
아직도 구약의 율법에 메여 산다.
아니 새로운 성령의 법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곧 구약 안에서 사는 것이다.
율법으로 사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왔으되 그 법을 따르지 못하고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고
한번도 따르지 않으니 생명의 역사,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갈5: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신약시대를 지나 성령의 시대를 살면서 아직도 구약시대,
율법아래서 종 노릇하는 사람들이여 성령의 소리를 들으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들으라.
우리는 지금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왜 예수님이 하늘로 다시 가셔야 하는지 아는가?
예수님은 반드시 가셔야했다.
성령이 오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친밀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약의 율법이 아닌
새로운 심비에(마음의 비석- 즉 마음과 생각)계셔서
새로운 성령의 법을 따라 살게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살면 우리는 율법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영으로 살게 된다.
현대어 성경은 갈5:18절을 이렇게 다시 말한다.
"그러나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살면
더 이상 억지로 율법에 복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구약시대, 율법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그렇게 귀한 신약시대도 아니다.
신약시대보다 더욱 놀랍고 신비롭고 기적과 같은 삶을 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히10:16]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첫째,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는 영인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이요
둘째, 그 성령께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므로 순간 순간마다
성령의 법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셋째, 예수로 충만케 하기 위해서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 가면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
성령의 열매를 통하여 우리를 심판 하신다 했다.
그럼 그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맺는가?
내가 맺는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왜 내가 열매 맺으려고 용을 쓰는가?
왜 그렇게 노력 하는가?
열매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 아니라 단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붙어 있는 다는 말은 내가 죽고 나무를 살리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열매가 맺는다.
내가 죽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나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생각,
성령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한번뿐인 생명이 어찌 매일 죽는가?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전15: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날마다 죽는 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생각 속에 주시는 성령의 법,
성령의 뜻,
성령의 생각,
성령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다.
전제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라고 했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셔야 함을 모르셨을까?
그분은 아셨다.
성령의 새로운 법도 아셨다.
어떻게 그분의 자녀들이 음성을 듣고 따르고 하는지 아신다.
성령의 법,
구약의 율법에 매여 살지 않고
오직 심비에 새긴 성령의 법을 따라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생각, 그분의 마음을 성령이 아시니
그 성령이 주시는 생각과 마음이 내 마음과 생각에
주시니 그 것을 오직 순종함이 핵심이다.
내가 날마다 죽을 수 있다는 말은
성령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싸울 때
생각과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죽고 주는 사는 것은
오직 이 성령의 법을 따르는 성령의 생각,
성령의 마음을 따르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법,
나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고 내 생각을 죽이고
성령의 생각,
성령의 법을 따르면
열매는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것이다.
나무가 맺게 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 했다.
금지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오직 성령의 법,
생각과 마음에 주시는 뜻을 따를 때 반드시 이런 열매를 맺는 다는 말이다.
누가?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다는 것이다.
왜 자꾸 내가 열매를 맺으려 하는가?
나는 죽으라.
내가 죽어야 성령이 일하신다.
내가 죽어야 성령이 역사하신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산다.
내가 죽지 않으니 성령이 역사할 수 없고
성령의 열매도,
성령의 역사도,
하나님의 일하심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기억해야한다.
그분은 단 한번도 그분 자의로 일한적이 없다.
[요12:49]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마11:29)
그리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했다.
왜?
전제가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했다.
온유하면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가?
모세이다.
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 했다.
[민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런데 생각해보라.
모세가 진짜 온유했는가?
그는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같이 열 내고 화내고 했다.
그런 그를 왜 하나님이 온유하다고 인정하셨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함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온유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함이다.
다윗을 평가할 때 마음에 합한자다라고 할 때 전제가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다라고 한다.
[행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여기서 온유함이 뭔가?
온유함이 뭐길래 모세에게 예수님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나?
예수님 자신 스스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나?
이 온유함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에
들음 앞에
말 없이 자신을 죽이고 순종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온유>이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따름이 온유이다.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받은 훈련은 그 훈련이다.
가라고 할 때 가고 서라고 할 때 서는 훈련,
그것을 성경은 온유라고 말한다.
산상수훈에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했다.
땅은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
정복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전쟁은 하나님께 있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은 스스로 싸워서 자신의 의지나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을 따를 때 받은 상징이 가나안 땅이다.
예수님은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다 했다.
이유는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
왜 온유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생각을 따라 시킨 것
말하고 명령한 것만 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 사신 예수님의 사역원리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따르고
말하고 명령을 행하신 삶을 사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른 다는 말이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 능력, 거룩을 따를 수 있는가?
스스로는 절대로 없다.
언제 가능한가?
나는 죽고 오직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방법처럼
오직 성령이 내 안에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성령의 법,
제자의 법,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의 길이다.
언제 쓰임 받나?
내가 죽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
마음을 따를 때 이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쓰임 받는다.
성령의 법칙은 들음의 법칙이다.
온유는 들음에 전제한다.
듣지 않는 성령의 충만은 없고
들은 것을 따른 것이 성령의 열매는 맺는 삶이다.
성령의 법칙 첫 번째는 들음의 법칙이다.
들을 준비가 되면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
그래서 내가 말하고
그래서 내가 일하고
그래서 내가 주인 노릇하는 것이다.
듣는 다는 것은
신을 벗는 다는 것이다.
신을 벗는 다는 것은 내가 말하고
너는 듣는 다는 것이다.
신을 벗는 전제는
말하고 듣는 관계에 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의 일하심 전에
들음 앞에 서서
신을 벗는 우리의 모습을 기대한다.
성령의 충만을 원하는가?
신을 벗으라.
온유의 상태에 머무르라.
성격의 온유가 아니다.
자세의 온유다.
하나님은 들음의 관계 속에서
성령의 충만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이 세상에 내 놓은 하나님의 법,
우리를 사랑하시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