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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명

마지막 사명

 

 

 

 

 

 

 

 

 

 

 

 

 

 

마지막 사명(21:24-25)

 

 

일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이 있고

되어진 일을 말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을 세상이 좋아할까요

되어진 일을 말하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일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나의 업적을 이루어 보고 싶어합니다.

나의 공적,

나의 업적,

나의 되어지고 이룬 것을 증거하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여기부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에 한번도 사람의 역사를 허락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욥기가 그것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변론 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많은 내용을 요약하면 그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운행하고 섭리할 것이 무엇이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창조부터 타락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

인류는 자신의 역사를 이루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왕을 중심으로 세상의 역사를 기록합니다.

왕이 누구냐가 인류의 관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말하십니다.

 

 

오늘 요한이 요한복음의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증언>입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인공은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요한이 일입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말을 위해서 나의 것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내가 왕이 되고싶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역사입니다.

왕이 누구냐입니다.

주인이 누구냐입니다.

그래서 왕을 증거하고

왕의 업적을 증거하고

사람의 공적을 증언합니다.

 

 

시작이 다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증언자로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증인입니다.

 

 

증인은 자기의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증인은 자기의 사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증언은 오직 것을 말하고

주인공의 되어진 것만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아담은 증언자로서의 삶이 싫은 것입니다.

세상의 일의 주관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무슨 일을 했고

내가 어떤 일을 이루었고

그래서 감동하고 사람들을 놀랍게 만드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고

내가 무슨 이루었고를 말하기 좋아합니다.

 

 

그것이 실패 인생입니다.

바벨탑의 배경을 이해해야합니다.

이름을 내고 싶어서입니다.

이름을 내는 것은 나의 업적을 이루어야 하는 것인데

업적을 통해 이름을 내고 싶어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업적 내는 사람을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아담을 통해서 엄청난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내고 업적을 내는 일이 생기면 쓸어버리십니다.

생각의 악함은 자기의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이름을 내려합니다.

그것이 악함의 시작이요

죄의 근본이요

멸망의 기초입니다.

 

 

요한은 증인의 일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이름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 일을 기록한 제자" 정도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증인의 삶을 하나님의 지키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증언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걸어야합니다.

내가 ,

내가 이룬 일은 제발 감추어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바벨탑도

다윗의 인구 조사도

사울의 질투도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함입니다.

자기의 공적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우리의 일은 그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하는 ,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21 마지막절과

1 1절이 가지는 공통점의 흐름은 증언입니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과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 요한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도 증언하는 자로 정의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1:6-8)

 

 

 

요한복음 1장에서만 증언이라는 말은 무려 6번이나 사용되고

요한복음에서 무려 34번이 사용되는 단어가 <증언>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이 33번이 나오니 베드로보다 많은 단어로

증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와 구원 역사의 주체로서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이

우리가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인류 역사에 가장 악한 것은 증언하지 않고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역사의 주체가 되려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역사를 내가 만들고

인생의 일들을 내가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악입니다.

 

 

역사는 일이 만들지 않고 믿음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9]

 

 

우리는 내가 일하고 이름 내고 싶어합니다.

철저히 마귀적이요

사탄적이요

세속적입니다.

 

 

자꾸 나는 그런 유혹 가운에 머뭅니다.

이룬 일이 내가 것처럼,

되어진 결과가 업적인양 자랑하고 싶어하고

자랑을 토대로 이름을 내고 싶어하고

사람들로부터 뭐라도 얻어 내려는 심보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이어서 그렇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철저히 성령의 소욕과 싸우는 것입니다.

 

 

시작이 달라야합니다.

열심은 우리가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하고 순종의 결과를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기 싫어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름 내고 싶어서입니다.

 

 

사람들에게 업적을 내고 이름을 내고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잘하고

높고 다른 사람인 것을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흠이 되는 이야기,

진짜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운 이야기는 감추게 됩니다.

감춤의 본질은 이름이 부끄러워질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숨기고 감춤의 본질은 자신의 이름입니다.

자신의 업적입니다.

높아짐입니다.

그것이 실추되고 남들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증인은,

증언하는 자는 자신의 약함을 말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도리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삼아

더더욱 하나님의 일을 높입니다.

그것이 증인,

증언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한국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음란함을 신랄하게 고백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목사님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처절한 죄인됨을 가감 없이 고백합니다.

읽고 있는 저도 얼굴이 부끄러울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합니다.

 

 

분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기가 목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목적입니다.

자신이 약함,

자신의 허물,

자신의 죄인됨이 드러나야 하나님이 높아지시는데

자신의 이름,

자신의 업적,

자신의 공로만 말하니

자신만 드러나고 하나님은 높아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와 그분들의 차이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과 세상이 쓰는 사람의 차이점인 같습니다.

 

 

말을 바꾸어야합니다.

설교를 바꾸어야합니다.

이야기를 바꾸어야합니다.

 

 

우리의 됨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우리의 부족을 말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부족을 하나님이 어떻게 채우시고 회복하셨는지

하나님의 이야기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저를 부르셨냐고 수없이 묻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역을 해야하는지 없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가지 못하고

뒤로도 가지 못하고

어디 하나,

어디 사람 의지할 곳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 나입니까? "

 

 

대답이 너무 간단했습니다.

간단한 대답에 거부할 없는 영적 무게로

두손들고 주님앞에 섰습니다.

 

말씀은

 

"네가 많은 사람들 중에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저는 말씀이 저의 전부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 중에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저입니다.

 

 

그래서 잃을 것도 없고

빼앗길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습니다.

그냥 많이 부족하니 섬기고

많이 부족하니 최선을 다해서 달려야합니다.

많이 부족하니 자랑도 못하고

많이 부족하니 비교도 못합니다.

많이 부족해서 어디 사역한다 말도 못합니다.

많이 부족해서 배울 밖에 없습니다.

많이 부족하니 내가

내가 지내 모든 것이 그냥 은혜입니다.

입는 하나도,

사는 하나도,

지내는 하나도

숨쉬는 하나도 그냥 은혜입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는 설명할 없는 삶이 저의 삶입니다.

 

 

시간이 수록

마음을 잊지 않으려합니다.

가나안을 들어가서 사는 삶이 나아지고

그냥 편한 삶을 살게

많은 사람 중에 많이 부족한 나를 잃고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잊어버릴까 두려운 것입니다.

 

 

작은 하나,

남아공을 와서 집을 구하고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쌀을 구하고

김치를 먹고

아이들의 사는 것과

사역하는 현장과

만나는 사람들과

죽을 뻔한 고비 고비를 넘기는 모든 과정들이

내가 잘해서 이룬 것이 아님을

저는 기억하고

나의 입술에 하나님을 증언하는 삶이 끊어지지 않기만

소망하는 것입니다.

 

 

너의 입술의 버릇이 있습니다.

말의 버릇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입니다.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 괜찮은 것입니다.

그것이 입에 버릇이 되었습니다.

이래도 괜찮습니다.

저래도 괜찮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는 입술로서의 ,

증인으로서의 삶을 산다면 그것으로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하는 증인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들 자기의 일을 자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다들 너무 잘해서

너무 실력이 뛰어나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이 높아지는 사람을 만납니다.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지만

그럴수록

마음에 다짐합니다.

 

 

"증언만 할래"

"증인만 할래" 입니다.

 

 

요한은 오늘 자신의 많은 성경의 기록을

증인의 삶으로 자신의 시각을 잃지 않습니다.

 

 

증언의 시작은

밧모섬 아무도 없는 그곳

없고 늙어 늙어

광야 모래바람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명을 끝까지 지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1:2)

 

 

백발이 성성한 늙은 노인 요한이

오직 것을 증언하는 말로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다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글을 이렇게 남깁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0-21)

 

 

 

증언의 삶을 사람만이

기다림이 복입니다.

증언의 말로 채워진 인생이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증언의 삶을 아름답다 칭찬하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칭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지

인생만으로 아름답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는 삶입니다.

 

 

증언!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인생의 마지막 사명입니다.

 

 

 

 

 

 

 

*오늘로 요한복음을 마칩니다.

이제 증언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도행전을 함께 묵상 하려합니다.

동안 함께하신 분들

간단한 댓글로 느낀 마음들을 나누어주시면

저에게도 힘이 같습니다.

위로와 격려의 '댓글' '좋아요'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