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모세의 공통점 열가지(요21:15-19)
모세는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고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이끈 지도자이다.
두 사람에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주님이 부르신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장 강력한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선택할 때가 아니라
부르심을 통해 서게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세운 사람이다.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작이 주님이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의 모든 시간 동안 함께한다.
언제 우리가 약해지나?
언제 우리가 힘들어지나?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
주님이 나를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이다.
물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나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베드로나
모두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택해서 여기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택해서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존재 이유이다.
힘들 때,
맘이 아플 때,
남들이 모르는 고통가운데 신음할 때
우리가 주님께 몸부림 치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주님이 부르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능력이다.
우리는 착각한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 생각하면
내가 예수를 믿지 않을 권리도 있다 믿는다.
내가 이 교회를 선택했다 생각하면
내가 이 교회를 버릴 수 있다 생각하는 근거가 된다.
아니다.
예수도
교회도 주님이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선택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세움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선택되어져서 목적을 위해 세워진 사람이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다.
둘째, 물에서 건짐을 받은 경험이 있다.
모세는 출생에서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과 지내다 물위를 걷다 빠져가는 가운데 건짐을 받았다.
무슨 말인가?
제 2의 생명이다.
인류의 죄로 온 인류가 물에 죽었다.
그러나 거기서 오직 노아의 가족만 구원을 얻는다.
생명이 건짐을 물에서 받음이 새로운 생명으로 간다는 상징이다.
모세와 베드로는 모두 물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상징이다.
물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된다.
요단강을 건너고
홍해를 건너고
물을 지나야 된다.
물은 성령을 상징한다 했다.
성령의 역사를 지나야 구원의 백성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모세도 베드로도 모두 물에서 건짐을 받음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인생이 된다.
우리는 한번 죽었다 살아난 인생임을 기억해야한다.
죽었다 살아난 기억이 없다면,
영적으로 죽었음을 고백하지 않는 인생은 사용될 수 없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물에서 건지는 역사를 경험한 사람만이
주의 복음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 불꽃 가운데 사명을 발견한다.
모세도 불꽃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베드로도 불꽃 앞에서 숯불 앞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바다 옆에서 예수님은 불을 피우고 생선과 떡을 준비하신다.
물은 옛 자아의 죽음,
옛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임재를 함께 의미한다.
사명은 불꽃 가운데 찾아오시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다.
성령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는 하늘의 마음,
성령으로만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불꽃 가운데 그들은 사명을 찾게 된다.
넷째, 세상적으로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
모세는 나이 80에 부름을 받았다.
자기의 의지로 뭔가를 할 수 있을 근거가 없는 나이다.
도망자에 살인자에 촌부로 목동으로 세상적으로 소망이 없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최고의 제자로 살지만 주를 부인하고 좌절하고
누구보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있는 모습이다.
세상적으로 소망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쓰신다.
세상적으로 소망이 있고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에게 근거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문제지 반드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주님은 특별한 사람,
특별히 많은 사람을 이끌 지도자는 자신에게 소망이 없는 사람,
온전히 하나님만 드러낼 사람을 택하신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요셉도 다 자기의 약함과 자기에게 의지 할 모든 것을 끊어내신다.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한다.
스스로 가지 않으면 요셉을 통해 보듯이 억지로 보내버리신다.
다윗도 억지로 잘라내고 도망하게 하고
자신이 믿을 어떤 것들을 잘라내게 하신다.
세상적으로 소망이 없을 때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다섯째, 그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양, 백성이다.
모세의 삶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베드로의 삶의 목적은 주님의 양이다.
우리의 사명이 뭔가?
어떤 위치가 아님을 기억해야한다.
어떤 권세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어떤 잘나가는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그냥 백성이고
그냥 양이다.
내 백성도
내 양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주님의 양이다.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나의 어떤 상태로 본다.
우리는 우리 삶의 이유는 나로 본다.
아니다.
주님이 부르신 사람의 삶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늘 백성이고 양이다.
주를 경배하고 주를 사랑하는 목적은
주를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함이다.
주님의 목적,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 세우시는 목적은
나가 아니라 나를 통해 세우실 백성과 양이다.
그렇다고 양이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백성도 목적이 아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백성이고
주님이 사랑하는 양이다.
우리의 목적은 주님이지만 그 주님의 목적이
양이고 백성이기에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양이고 백성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그러면 양을 먹이고 양을 돌보라고 하신다.
양이 사랑스러워,
백성이 좋아서가 아니다.
양도 백성도 섬기는 정도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만큼 가능하다.
주를 사랑하니 양이고
주를 사랑하니 백성이다.
양만 좋아해서도
백성만 좋아해서도 안된다.
체질적으로 양이 좋고
체질적으로 백성이 좋은 사람이 있다.
아니다.
주님을 좋아해야 양도 좋고
주님을 사랑해야 양도 사랑하는 것이다.
양은 애먹이고
백성은 원망만 한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 만큼 돌보는 것이다.
그들이 사는 삶의 목적은 언듯 보면 백성이고 양이나
실은 주님이다.
주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명이 온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꿈이다.
여섯째, 주님께 받은 것으로 돌본다.
모세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백성을 세운다.
십계명 돌판도,
율법도 지혜도 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먹이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으로 움직였다.
베드로는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믿음은 따름으로 가는 방향이라했다.
따름의 전제 조건은 주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모세도 베드로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했다.
모세는 하늘의 만나와 하늘의 율법과 명령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따랐다.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고 돌보라는 명령이 있다는 말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주셔야 먹이고
하늘에서 와야 돌본다.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에게는 없는 것,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먹이고 돌보는 근거가 된다.
첫 사명도 이 본문으로 왔다.
벌써 십 수년전이다.
두 번째 사명도 이 본문으로 왔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주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이다.
양을 먹이고 돌보는 전제는
하늘로부터이다.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먹이고 입히는 것이다.
그 마음을 주셨다.
그것이 감동이고 그것이 감격이다.
내 것이 아닌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
신령한 하나님의 것으로 하신다는 약속이다.
모세와 베드로는 그것을 약속 받았다.
그 약속의 상징은 모세에게 지팡이이고
베드로에게는 말씀이 약속이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실 때 우리의 것으로 하라고 하시기도 하지만
결국 하늘의 것으로 하게 하신다.
가진 것이 사명이기도 하지만
그 사명에 불을,
불꽃을 일으키시는 것은 하늘이다.
문제는 내 삶의 목적이 주님의 백성,
주님의 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꿈과 사명이 주님의 백성,
주님의 양이기만 해도
내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없던 것도 떨어지고
생각지 않은 것들이 채워지는 은혜,
그것이 하늘의 은혜들이다.
모세와 베드로는 자신에게 없던
놀라운 권능과 기적과 말씀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것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육체의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다.
모세는 족보 없는 왕자다.
베드로는 족보 없는 어부다.
신분의 한계,
태생의 한계,
성격과 자존감의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다.
모세의 가장 극심한 문제는 그의 자존감이다.
모세가 불꽃 가운데 주를 만나고 기적을 몇차례 경험하지만
주님의 사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가는 길에서 죽을뻔 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죽기 까지 하기로 했으나
결국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갔다.
철저히 망가지는 자신을 보게된다.
출신에 태생에 자신의 했던 행동들로 육체의 한계를 너무 깊이 절감하는 두사람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그들을 다시 찾고 찾으신다.
그래서 그들이 얻은 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주를 향한 신뢰이다.
주를 믿는 믿음의 강력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시험속에서 피어나는
기쁨과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기대한다했다. (벧전1:6-7)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도 그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이다.
자신의 자존감,
자신의 무존재감이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실패자인데
그래서 두려운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을 섬기라 한다.
그 사람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로 한다.
그것이 아픔이다.
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나는 사람 때문에 도망하고
나는 사람 때문에 숨었는데
그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세우라 하신다.
역설이다.
내 인생의 역설이다.
나의 상태와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모세는 자꾸 도망한다.
기적이 와도
능력을 봐도
나는 못한다,
나는 안된다,
나는 말이 둔하고,
내가 누군데 저 사람들 앞에 서며
이런 저런 핑계로 도망한다.
주님은 그래서 지팡이도 주고
아론도 주고
그래서 결국 내가 네 입에 함께하고
내 말에 함께 할 것이라 약속하신다.
나를 의지하지 말고
주를 의지하라 하신다.
나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 한가지는
나를 봐서 그렇다.
우리의 눈이 자신 안에 머물러서 그렇다.
주님은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 한다.
주님은 육체의 한계를 보지 말고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을 보라 하신다.
육체는 육체로 그 한계를 결코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의 한계를 육체로 넘으려 한다.
학력과 돈과 지위와 위치로 넘으려 한다.
아니다.
육체의 한계는 육체가 아니라
영으로 넘어야 한다.
육체는 영이 떠나면 육이고
영이 와야 육체는 영원이 된다.
그래서 성령이다.
육체의 한계를 넘는 유일한 길,
성령이다.
여덟번째, 부끄러움을 넘은 사람이다.
실패자 인생,
실패한 삶으로 오는 부끄러움을 넘은 사람이다.
참 수치스런 삶의 과거를 가진 두 사람이다.
말이라도 잘 못하면 좋은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말은 얼마나 빠른지 모른다.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절대 주를 위해 살겠다고 말은 잘 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자기 성질을 못이기고
부인하고 저주한다.
그것이 더 부끄러움이 된다.
부끄러움을 이기는 삶이 되야한다.
문제는 그 부끄러움을 이기는 힘이 내 안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본질은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이다.
다시 주를 만나는 회복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부께서 부르시는 존재로서의 만남이 있었고
베드로는 부끄러움을 회복할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
이것이 축복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
부끄러운 과거를 이기고 다시 설 수 있는 기회이다.
주님은 약한 자를 부르셔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죄인을 부르셔서 자칭 의인이라는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참 부끄러움은 과거의 실패가 아니라
나는 괜찮다는 의인적 마음이다.
회복의 만남이 필요하다.
늘 기다리시는 주님은 만남만 아니라
떡과 물고기와 숯불을 피우고 기다리시는 주님이다.
다만 내가 나는 부족하다라고 고백하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인간적 기질이 아닌
주를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신다는 겸손의 마음,
주님께 나를 맡기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모세를 다시 부르실 때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신을 벗는 것>이다.
신 벗음이다.
신 벗음은 따르겠다는 결단이다.
거룩한 땅,
거룩한 장소에서는 사람의 수고와 사람의 열심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고
지휘하시는 곳이다.
그곳에서 사람의 일이란,
부르심을 받은,
따르는 자의 일은
신을 벗는 것,
오직 따르는 일이다.
그래서 아홉번째는 자기 의지가 없는 사람이다.
오직 따랐던 사람이다.
신을 벗었던 사람들이다.
신을 벗지 않으면 결코 사용하지 않으신다.
신을 벗는 과정을 지나야한다.
내 의지로 내 뜻대로 뭔가를 하지 못하는 삶이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신을 벗으라 하고
베드로에게는 어떻게 죽을지 미리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않는 삶을 원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주님께 더 거룩하게 사용되지 못하는가?
신을 벗지 않아서이다.
무슨 말인가?
내 의지,
내 생각,
내 판단,
내 기준으로 살아서 그렇다.
그것을 버려야한다.
그냥 성령께서 찾으시면 가고
원하시면 내려 놓아야한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한다.
그것이 신을 벗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이다.
하나님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백서이다.
하나님의 양이다.
내가 하는 것은 그냥 나귀를 가져 오라면 가져오고
물고기 속에 돈을 주라면 주면 된다.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면 그냥 던지는 것이다.
내 뜻대로 살았더니 나 뜻대로 하나도 되지 않는 인생인 것을 아는 시간,
그것이 육체의 한계를 아는 시간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나를 버리고
신을 벗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신을 벗지 못하면 거룩한 땅에 거하지 못한다.
거룩한 곳은 성전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는 없는 곳이다.
그곳에 세상 나라고
거룩한 곳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하나님이 친히 갈 바를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나라다.
그래서 작은 것도 묻고,
작은 것도 두드리고
작은 것도 주님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이
신을 벗는 삶이다.
마지막 열 번째는 여러분의 몫이다.
한번 찾아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댓글을 남겨주기 바랍니다.
모세와 베드로의 공통점이 무엇이 있는지?
한번 함께 나누면 좋겠다 생각이 드는데요..
귀한 댓글들 기대하고 기대합니다.
함께 말씀에 동참하면 참~좋겠습니다.
오늘도 행복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