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심과 하나님의 꿈(요21:1-17)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과 그들이 완전히 헌신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늘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는 예수님을 세 번째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만났는데 그들이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변한 것이 없을 뿐더러 이전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과 부활한 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 이들은 아직도 이러고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보면 오순절을 기다려야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는 때가 차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무슨 문제로 이렇게 부활의 주를 만났지만
여전히 옛 삶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기적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씀을 따랐더니
물고기를 배가 가득찰 만큼 잡게 됩니다.
기적입니다.
놀라움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단지 주를 보게하는 방편입니다.
능력은 오직 주를 보게하고 주안에 머무는 방편입니다.
능력이 목적이고
기적이 목적이면
주를 보지 못합니다.
주를 보는 방편으로서의 기능이지
기능이 목적이 되는 순간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고
나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주님과 삼년을 지냈고,
부활하신 주님도 만났는데
왜 제자들은 일상의 삶에 머물러 있습니까?
만남은 그냥 만남입니다.
만남이 나의 삶을 움직이게 하려면
나를 움직이는 이끄심이 있어야합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긴 호흡의 사명이 필요합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사명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교회를 다닙니다.
왜 우리의 삶이 늘 단편적 삶에 머물러 있습니까?
삶을 던질 만큼,
삶의 전부를 헌신할만큼의 이끄심이 없어서입니다.
믿음을
신앙을
하나님을 단지 만남으로만 여기면
우리는 하나님과 신앙과 믿음을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합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한 대상일 뿐입니다.
그물에 고기가 가득하고
배에 고기가 가득 채워진 그 기적까지는
오직 나의 뜻을 위해 내가 끌고 가는 것입니다.
내가 목적이고
내가 이유이고
내가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입니다.
제자들이 처음 주를 만났을 때와
제자들이 지금 주를 만났을 때는 다른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지금 주를 만났을 때는 나에게 소망이 없다고
나에게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은 같은 사명이 왔지만
나에게 가능성을 두는 사명이고
지금 만나는 사명은 나에게 희망과 소망이 없는 사명입니다.
사명의 다른 말은 이끄심입니다.
믿음은 이 이끄심으로 초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근거는
나가 남았을 때 나를 믿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이 될때 믿음이 됩니다.
나에게 믿을 구석이 남았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은 이끄심이 아니라
내가 이끌어가는 삶이되고
그 결국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는 나에게 소망 없음입니다.
그런데 처음 불리웠던 때는 나에게 소망이 있다고 믿었기에
철저히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철저히 파괴하십니다.
아니 파괴하신다는 말보다 그냥 지켜보십니다.
부인하고
떠나고
좌절하고
실패하기를 인내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의 실패입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우리를 이끄시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모세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요셉이입니다.
야곱입니다.
하나같이 그들은 이끄심을 통해 최종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이 끄심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의 실패 안에서 이끄심의 씨앗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서 뜻을 정하고
수고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아무리 교회,
아무리 목회,
아무리 선교이어도
자신이 이끄는 모든 것은 다 실패해야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믿는 소망이 끊어져야 하나님의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타락한 세상의 시작은 자기를 믿기 시작한 때부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모든 인간의 죄의 뿌리는 자기입니다.
자기를 믿는 동안은 절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믿을만한 것이 있는 사람일수록,
세상에 뭔가 내 놓을 만한 것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거부합니다.
거부가 아니라 체질적으로 자기를 믿기에
하나님의 이끄심은 따를수 없습니다.
그것이 체질입니다.
우리의 체질은 철저히 내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
내 습관을 믿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자기가 늘 잘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잡으러 갑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잘 잡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잘 하는 것이 자기가 믿는 것입니다.
이끄심에 따르려면 철저히 자기가 믿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베드로에게 물고기 잡지 못하는 한계의 상황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또 베드로가 얼마나 자기에게 소망이 없는 사람인지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자신 없는 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또 물으십니다.
자신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랑을 잘 하면 묻지 않습니다.
잘하지 못하니 묻습니다.
우리가 잘 하는 것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은 바보입니다.
내가 잘 못해야 주님이 이끄십니다.
바보는 내가 잘 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못해야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주도적 삶이 아닙니다.
척척 잘 알아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광야 사 십년의 삶입니다.
이끄시는 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끄시는 대로 사는
우리의 삶이 목적인데
잘 하는 것 자랑하고
잘하는 것 붙들고 살면 망하는 인생입니다.
목적을 구분해야합니다.
목적은 우리의 주도적 인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는 이끄심을 따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이끄심을 위한 유일한 상태입니다.
이끄심은 믿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끄심은 내가 나를 포기할 때만 가능합니다.
인생은 광야입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죄된 인간의 삶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하는 것 믿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삶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광야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끄시는 대로 가야만 사는 세상입니다.
믿어야 가는 곳이 광야고
믿어야 맡기고 이끄시는 대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베드로를 위한 유일한 기도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 다음의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데
이끌어야 하는데 믿지 못하면 이끌지 못하니
먼저 믿음을 위해 훈련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이끄심 안으로 가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선도 떡도 이끄심을 위한 방향을 보여주십니다.
("떡과 포도주 그리고 물고기" 참고-
http://www.lovesa.or.kr/jsp/board/view.jsp?type=U11&seq=533&cpage=6&searchType=&searchKeyword=
우리에게 꿈은 내 꿈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꿈을 위해 내가 그 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꿈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지
하나님의 꿈에 내 인생을 헌신하는 것인지 구분해야합니다.
내가 꿈꿀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꿈을 가질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나를 통해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꿈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회복입니다.
그 일에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베드로에게 그 하나님의 꿈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꿈을 위해 베드로에게 믿음을 지나 이끄심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떡과 생선입니다.
그 자리 앞에서 하나님의 꿈을 보이십니다.
그 꿈은 <양>입니다.
<내 양>입니다.
우리의 양이 아닙니다.
나의 양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내 양을 꿈꿉니다.
우리는 내 것을 꿈꿉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꿈꿉니다.
그래서 능력도 필요하고
자리도 필요하고
내 사람도 필요하고
내 돈도 필요합니다.
양이 내 것이 될 때 우리는 이끄심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여전히 믿음은 나를 위한
내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주님은 늘 꿈꾸십니다.
내 백성을 꿈꾸고
내 양을 꿈꿉니다.
내 백성을 위한다고 하면
애굽 장자를 다 죽여도 좋습니다 .
내 백성을 위한다고 하면 솔로몬의 지혜는 물론이고
장수도 부귀도 영화도 다 준다고합니다.
내 꿈을 위해서라면 하늘이 해도 달도 멈추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가는 일도 우스운 일입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수 많은 나라를 쳐부수는 일도 너무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꿈 때문에 이 세상은 운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그 이끄심의 정점은 바로 성령입니다.
친히 우리를 이끌기 위해
우리 안에 영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목적은
우리의 능력도
우리의 힘도
우리의 권세도 아닙니다.
오직 이끄심입니다.
나를 사용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성령을 이용합니다.
내가 이끌고 가려합니다.
내가 끌고 가려합니다.
믿음의 이유,
성령이 오신 목적은
이끄심입니다.
내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도 주시고
말도 주시고
길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은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도 자꾸
성령을 이끌고 가라고합니다.
아담이 되라고합니다.
그래서 또 망하라 합니다.
성령을 내가 부리는 영으로 만들려합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내가 이끄심을 따르기 위함인데
자꾸 내 인생을 위해 성령을 이끌려합니다.
그래서 슬픔입니다.
그래서 탄식입니다.
말 할 수 없는 탄식은 이끌림이 아니라 이끄는
<자기애>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반대 말은 악령이 아니라
<자기애>입니다.
성령은 자기애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애가 충만한 곳에는 성령,
하나님의 신은 떠나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곳에는 악령이 임재합니다.
자기애는 세상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신을 떠나게 하는 주범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전제 조건은" 자기를 사랑함 같이"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그렇게 물으십니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5)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사명을 이루지 못합니다.
자기애에 빠진 인간에게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일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애가 아니라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것이 이끄심 안에 거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닙니다.
자기애입니다.
왜 주님이 사명을 주시기 전에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는지
알아야합니다.
사명은 자기애를 포기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자기애는 사람을 하나님되게 만듭니다.
자신을 하나님처럼 살게합니다.
그곳에는 이끄심의 삶에 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꿈은 양을 먹이는 것은
자기애를 포기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못하면 주님의 것들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결코 주님의 양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자기애에 빠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망한 곳에는 자기애가 있습니다.
이끄심의 기초는 믿음,
이끄심의 방향은 주님의 사랑,
이끄심의 반대는 자기애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질문,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우리 모두를 향한,
자기애에 빠진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거룩한 질문입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당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고백해야하고
그렇게 해야하는 우리의 고백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는 고백을 해야합니다.
때로 좌절하고 실패해도
주님이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다시 회복하시는 불꽃과 생선과 떡의 은혜가 있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지 링크를 꼭 읽으세요)
주님의 질문도
베드로의 대답도 다 방향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방향,
하나님의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