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예수님이 오셔서 주시는 세가지

예수님이 오셔서 주시는 세가지

 

 

 

 

 

 

 

 

 

 

 

 

 

 

 

 

예수님이 오셔서 주시는 세가지(요20:19-23)

 

 

부활은 땅에 없는 가지를 가져다 주었다.

죄를 범함으로 사라진 하늘의 가지이다.

예수님은 가지를 부활의 몸으로 다시 회복시켜주신다.

 

 

첫째, 평강이다.

인간의 본질은 높음을 향한 추구라하였다.(인간의 본질-노트참고)

인간 죄의 본질의 시작은 하나님이 되고자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로 인해 인간은 높음을 향한 추구에 갇혀서 산다.

그래서 인간들이 죄를 범한 가장 강력한 높음의 추구는 바벨탑이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가진 본질의 핵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높음을 향한 추구다.

그런데 세상에서 인간이 가지는 높음을 향한 추구는

두려움을 면하려는 하나의 방편이다.

죄로 인한 두려움,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찾아온 두려움,

채워지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가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채우려 높아지려는 추구가 계속된다.

두려움의 실체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데

사실 두려움의 실체,

높음을 향한 추구의 실체는 하나님의 영이 떠남으로 말미암아 찾아온 두려움이다.

두려움 가운데 사는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길을 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첫째가

<평강>이다.

 

 

평강은 하나님의 신만이 주시는 하늘의 창조적 감정이다.

사람에게서,

육체가 사람에게서는 없는 마음의 상태,

하늘의 상태가 평강이다.

평강을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만남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두번씩이나 평강을 선언하시고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하늘의 마음,

평강이다.

 

 

둘째, 성령이다.

 

평강은 성령을 통해서만 온다.

육체가 인간에게 것은 죽음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육체가 사람에게 영원을 주시는 일이다.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피와 물이다.

물과 피를 솟으심으로 완성하신 사건이 십자가이다.

피는 제사장적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사죄의 은총을 허라하셨다.

물은 떠난 하나님의 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상징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

성령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에 다시 평강과 함께

떠나버리신 하나님의 ,

성령을 땅에 허락하시는 의미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

 

 

그래서 성령의 사역의 핵심은 용서이다.

성령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떠나버렸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용서의 사역을 허락하신다는 의미다.

용서의 권세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은 가장 먼저 죄와 관련이 있고

죄를 용서하고 기도하고 하늘을 여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그냥 주기도문이 아니다.

주기도문은 용서를 이루는 기도이다.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핵심은

용서이다.

성령은 용서의 완성이 이루어지면서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회복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의 회복이다.

 

 

회복은 제자들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전파되고 확장되어지는 것을 전제한다.

 

 

성령 사역의 기본은 용서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의 지속이

제자들을 통해 성령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용서하는 삶의 모범이 되며

용서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땅에 하나님의 용서를 허락하며

용납하며 죄인들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기본 사역은

용서와 함께 일하신다.

 

 

성령으로 일하면서,

성령 사역을 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역의 기본은

용서이어야한다.

 

용서가 없는 사역,

용서가 없는 삶은 성령과 상관없는 사역이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모든 내용의 기본은 용서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

또한 일흔번에 일곱번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중요한

내용이 오늘 성령에 관한 내용이다.

 

 

셋째, 사명의 회복이다.

 

성령이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것은 사명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씀이 해석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고 돌본다고 해야한다.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은

정복자적,

지배자적 관점의 해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마음은 섬김과 돌?이다.

 

 

아무튼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은 죄를 짓기 전의 인간이다.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사명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유는 세상을 섬기고 돌봐야 인간이

자신을 섬기고 자신이 높아지는데 목적을 가지기에

세상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성령이 떠나고 다시 오신 후에 사명이 주어진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예수님은 평강으로 찾아오시고 잃어버린 하늘의 마음,

하늘의 감정을 주시므로 사람이 다시 생기를 입고

새로운 사명을 가지게 하신다.

 

 

2 사명의 회복이다.

보내시는 예수그리스도이다.

바로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가르쳐 지키게 하고 제자를 삼고 세상을 성령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부활의 의미는 세가지가 회복되는 것이다.

생명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평강의 회복이요,

떠났던 하나님의 신이 돌아옴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이요,

잃었던 사명이 다시 주심으로 사명의 회복이다.

 

 

 

세가지를 가지지 못한 인생은 아직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부활은 가지와 함께 일하신다.

생명의 평강과

성령의 임재와

사명의 회복이다.

 

 

예수를 믿는가?

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믿는다면 잘못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이 아니라

생명의 평강과  잃어버린 성령과 사라진 사명을 다시 주시기 위해서

예수를 믿게 하셨다.

 

 

우리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가?

평강도 없고

성령과 함께하는 발걸음도 없고

사명도 없는 인생이 아닌가?

 

 

평강은 고사하고

시간이 갈수록 삶의 두려움에 떨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외로움과 두려움에 살지 않는가?

 

 

성령은 고사하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하나님과 어떻게 대화하는지도 모르고

성령을 경험하고 만난 것이 무슨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가 것은 아닌가?

 

 

사명은 무슨 사명인가?

살기 바쁜데

먹고 살기도

목숨 부지 하기도 힘든데

사명을 잡고 산다는 것이 무슨 사치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런 것에서 벗어나는 인생을 말한다.

내가 살고자 하는 나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시기 원하시는

평강과 성령과 사명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시간이 늦기 전에 주를 만나야한다.

그냥 기도만 들어주시고

잠깐 응급처치를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부활과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하는 주님을 만나야한다.

 

 

인생의 회복은

하늘의 평강과

성령의 동행과

사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일어나라 친구들이여~

형제들이여~

 

 

우리는 어제의 두려움 속에 사는 인생이 아니며

하나님의 신이 떠나 홀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인생이 아니며

사명 없이 오직 배와 목적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강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약속의 실체인 성령과

주와 세상을 위한 사명으로 살아야 하는 위대한 존재로서의 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원래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야한다.

땅에서 연습하고

하늘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땅은 연습이다.

거룩한 연습!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거룩을 연습하라 하신다.

경건을 연습하라 하신다.

 

 

어떤 성경의 위대한 인물도 연습 없이

훈련 없이 사람은 없다.

광야는 훈련이다.

 

 

평강도

성령도

사명도 연습하고 훈련을 통해 배워가는 것이다.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손을 만지라 하시고

옆구리를 만지라 하신다.

 

우리를 너무나 아시는 주님은

있는 그대로 우리를 맞으신다.

약하지만

강하게 세우시는 주님으로 오늘도

 

평강과

성령의 능력과

사명을 향한 추구로 우리의 삶이 기쁨의 삶이기를 소망해 본다.

 

 

 

 

 

 

 

 * 하늘에 걸린 발래집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발래줄에 걸려 있어도 자리에 있으면 평안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