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도 보지 못합니다(요20:11-18)
우리의 한계는 천사는 믿는데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만나는데 기적의 주체를 보지 못합니다.
능력을 경험하지만 능력의 근원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에서 천사를 봅니다.
천사가 왜 우느냐고 묻자 예수를 어디에 옮겼는지 알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천사와 대화를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하는 엄청난 상황 속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믿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와 이야기 하면서 예수가 나타나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4)
왜 그런가요?
예수님의 일하심을 늘 우리의 생각에 묶어두어서 그렇습니다.
찬사도 보고,
기적도 보도
능력도 경험해 보지만 늘 우리의 한계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내 생각에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예수님을 옮겨 놓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
반석에서 물이 나고
하늘에서 매추라기가 떨어지고
나무에서 불이 나지만 나무는 타지 않고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무너지며
하늘의 해와 달이 멈추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일을 하시는 분임에도
우리는 그 하나님을 내 생각으로 제한합니다.
그래서 사단이 노리는 가장 첫 번째 일은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고
생각에 길을 사람의 생각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은 부활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어졌으니 부활했을 것이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시체를 옮겨갔다는 생각,
그 생각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사단이 무슨 엄청난 일을 벌여서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짓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니 그들이 선악과를 먹습니다.
믿음을 버립니다.
믿음은 생각에서 옵니다.
생각은 비교에 갇힙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의 근본은 늘 비교입니다.
예수님과 세상 사람과 비교합니다.
세상 사람이 다 죽는데 예수님도 죽었으니 끝이다.
그것이 세상의 영이 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이요
육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아담이 빼앗긴 것은 생각입니다.
아담이 빼앗긴 장소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생각속에,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속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생각의 주체가 죄로 물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아니라
생각의 주체를 성령이 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생각하고
성령이 깨닫게 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핵심은 우리의 생각의 교정입니다.
교훈과 말씀을 풀어주심은 우리의 생각을 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부활한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 하신 것도 생각을 깨닫게 하심입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
우리의 몸과 영혼이 죄로 물들었기에 아무리 열심이라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것으로 덧입혀도 소망이 없기에
새로운 몸과 영혼을 주십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몸이 아직 세상에 있을 동안은 미완성이나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의 영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성령이 우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는 우리 즉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육체가 된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냥 육체입니다.
그런데 그 육체에 생기가 불어,
성령이 임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다시 영원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육체로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성령을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왔으나 성령과 상관없이 살면
그 사람은 그냥 육체입니다.
아무리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도 그냥 육체입니다.
성령의 가장 강력한 일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이끄시며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용서를 받아도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 했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성령은 우리를 육체에서 영원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에 따르지 않으면 육체입니다.
그냥 육체입니다.
그 육체는 결국 마지막 심판에 구원을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길을 내는 예수그리스도와
그 길을 걷게 하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구름과 불기둥입니다.
출애굽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을 가야 하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무시하고는 광야에서 단 하루도 살지 못합니다.
성령의 상징인 구름과 불기둥은 가자고 하는 대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에 매여
자기의 뜻을 좇아 살아갑니다.
자기 소견에 옮은 대로 행합니다.
거기에는 오직 눈물만 있습니다.
성령의 거룩한 눈물이 아닌
좌절과 절망의 눈물입니다.
스스로 해도 답이 없고
자신의 생각에 매여 소망이 없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놀라운 축복들이 기다립니다.
자신의 삶을 성령이 친히 주관하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짐이 없고
무거움이 없습니다.
그냥 걷는 동행입니다.
예수님의 가벼움과 쉬움의 비결은 그냥 따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각을 교정 받아야합니다.
생각을 맡겨야합니다.
생각의 조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안에서만
일하십니다.
그리고 주어지는 축복은
호칭의 변화입니다.
사람이 창조 될때 사람은 그냥 사람입니다.
그리고 후에 자기의 백성입니다.
그 후에 자녀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십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17)
호칭의 변화입니다.
사람에서
백성에서
자녀에서
이제는 형제입니다.
내 형제들입니다.
놀라운 이름입니다.
놀라운 감격입니다.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형제로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말한 예수님을 놀라움으로 증거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
하나님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된 죄를 생각부터 차단하시기 위해,
육체가 된 사람을 영원이 되게 하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마음의 감정을 바꾸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영,
성령의 일하심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과 함께 주기 원하신 것은 평안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성령이 주시기 원하시는 근본 은혜는 생명이고 평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두 가지 평안과 성령을 주십니다. (19,22)
성령의 길을 여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생각,
육신의 생각,
죄의 생각,
나 만의 생각에 매여있는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생각과 마음을 바꾸십니다.
생각과 마음이 바뀌지 않는 마음 밭은 여전히
열매 맺지 못하는 토양입니다.
열매가 없는 이유는
마음과 생각이 바뀌지 않아서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위치,
자기의 자리,
자기의 좋은 직장,
자기의 재물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 바보입니다.
생각이 성령께서 주관하지 않고
마음이 성령의 주시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육체>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
평안과 성령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성령께서 주시고
이끄시고
주관하지 않는 토양은 열매 맺지 못하는
악한 나무가 됩니다.
악한 나무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도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악한 나무입니다.
성령이 나를 주도하려면
내가 죽어야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나야 물과 피가 나오고
물과 피가 나와야 성령이 오십니다.
그래야 육체가 생령이 됩니다.
그래야 떠난 하나님의 영이 오십니다.
생기는 죽은 마른 뼈에 임하는 것입니다.
생기는 흙에 임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은 육체,
소망이 없는 육체입니다.
내 생각을 버려야
내 계획을 버려야 성령이 열매 맺습니다.
눈이 띄여집니다.
길이 보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선교현장은,
선교지는 선교사의 피로 세워집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것도
선교사의 피를 말리는 시간을 통해 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아픔과 좌절과 눈물과 외로움이
선교 현장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께서 교정하십니다.
선교지는 선교사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인도로 세우십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사의 피로 세워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세워집니다.
나의 생각도 버려야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 줄 믿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나의 교정된 생각과
그분께 전부를 내어드리는 겸손에 있습니다.
아침부터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오늘도 성령께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생각을 교정하시는 하나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드롱콥교회 전도하러 갔다 만난 노부부입니다.
평생을 살았는데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인생의 길을 만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