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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으로는 안됩니다

빈 무덤으로는 안됩니다

 

 

 

 

 

 

 

 

 

 

 

 

 

 

무덤으로는 안됩니다 (20:1-10)

 

 

동산은 이상 죽음의 동산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세상에 없던 것이 왔는데 그것이 사망입니다.

에덴동산이 사라진 것은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그곳은 어디나 에덴동산이 됩니다.

하나님과 거닐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

그곳이 에덴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죽음의 동산을 생명의 동산으로 바꾸셨습니다.

함께 생명을 누리고

육체의 몸으로 생명을 누리는,

죽음을 이기고 죽음이 이상 노릇 하지 못하는 나라,

에덴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기 원하시고

하나님이 인류역사를 그분의 섭리대로 운행하신 유일한 이유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회복하기 원하시는

<생명>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증거입니다.

죄를 입은 육체가 생명을 입는 증거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긴 증거이자

이상 무덤이 없는 하늘과 새땅의 증거입니다.

에덴,

시온의 시작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능력을 가지려 기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힘을 가지려 하나님을 믿습니다.

바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생명의 능력입니다.

생명의 힘입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오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

단한가지 이유는

아직 생명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구석구석을 주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나를 주장하면

세상의 능력을 좇아갑니다.

사망이 나를 잡고 있으면

세상에 매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됩니다.

세상의 시각,

비교가 나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살고

높아지고

이름을 높이는 아담의 본성이 우리를 끌고갑니다.

 

 

부활의 의미는

이상 세상에 매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살게 되는 능력이 있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과 같습니다.

무덤을 믿지만

예수님이 부활을 믿지만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8)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과 같은 상태입니다.

분명히 무덤인데

분명히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믿는데

그것이 나의 부활로 믿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눈물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1)

 

우리의 신앙은 무덤만 발견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사라진 것은 믿습니다.

장사 지낸 세마포와 얼굴을 감싼 수건이 벗겨진 것은 믿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예수님 같이 나도 무덤의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우리의 믿음은 거기까지입니다.

말씀을 듣지만 말씀이 영혼을 잡아 나의 삶을 믿음의 본질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매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신앙은 군중의 신앙과 제자의 신앙이 있습니다.

군중의 신앙은 바라봄의 신앙이 있고

따라옴의 신앙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도 바라봄의 신앙이 있고

연합의 신앙이 있습니다.

 

군중은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좀더 깊이 가면 군중이지만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저 종교로,

그냥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제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제자는 되었지만

그냥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어린적부터 믿고

집안이 믿고

어느 정도 복음이 이해되어져서 예수를 믿어 따르기는 하고

예배도 드리지만

자신의 삶에 부활의 생명과 연합하는

하나됨의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마지막은

자신의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확신입니다.

생명이 너무 강해서

모든 환경과 나아가 죽음까지도 이기는 믿음입니다.

 

 

한국은 핍박이 사라졌습니다.

핍박이 있었던 과거에 칼이냐 성경이냐를 택해야 하는 시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예수냐 집안이냐

예수냐 제사냐

성경이냐 칼이냐를 택해야 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

제사상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10:28]

 

 

 

생명입니다.

생명을 수유한 자의 담대함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믿음,

그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무덤을 소유하고 살아갑니다.

오직 무덤입니다.

무덤을 믿는 다는 것은

 

 

첫째, 자신의 살던 방식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10)

 

 

 

 

부활의 생명을 믿을 때나 믿지 않을 때나 자신이 살아오던 삶의 방식으로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전에 살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생명을 믿지 못하니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전에 살던 삶의 형식이 그대로 유지되는 모습입니다.

 

 

나의 삶이 전혀 변화가 없고

나의 자체가 목적인 삶입니다.

삶을 위해 돈도 벌고

삶을 위해 적당히 거짓말도하고

삶을 위해 사람도 속이고

돈에 매여

돈을 따르는 그런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이분들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과거에 만난 추억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특징은

추억이 언제나 꿈보다 사람입니다.

과거에 믿은 하나님이

지금 믿고 느끼는 하나님보다 언제나 큽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내고

미래를 위해 사는 힘이 없습니다.

하는 말은 언제나 지금 역사하는 생명의 힘이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옛날에 내가 이랬고 이전에는 이랬고입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생명이 없기에 미래에 대한 기대는 없습니다.

꿈은 오직 자기의 꿈이고

하나님의 꿈에 자신의 삶을 던져 함께하는 꿈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꿈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사람을 이용하게 됩니다.

 

 

 

 

둘째, 생명을 전하지 않고 경험을 전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생명을 전하지 않고 경험을 전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경험한 사람을 생명을 이야기 하고 싶어합니다.

생명이 너무 놀랍고 가치 있어 전부를 팔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를 알지 못하니 자기의 경험으로 살게됩니다.

자기 안에 생명이 없으니 남의 이야기

전해 들은 이야기

나와 상관없는 누가 이렇게 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래서 경험한 생명이 아니고 경험한 자기의 이야기가 전부가 됩니다.

자신의 경험이 최고입니다.

자신의 경력이 최고입니다.

자신의 업적이 힘이됩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과거에 매이지 않을 뿐더러

현재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미래의 하나님의 생명을 전부를 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현재의 고난이 아니라 장차 주실 영광을 위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과거와 현재의 고난을 이기게 됩니다.

 

 

생명은 생명을 만듭니다.

그러나 사망은 과거를 묵상합니다.

생명은 미래를 기대하고

사망은 자신을 묵상하게 합니다.

생명은 기대의 삶을 살지만

사망은 후회의 삶에 갇힙니다.

 

 

셋째, 친근감의 결핍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있습니다.

눈앞에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니 멀리 있는 하나님,

하늘에 있는 하나님,

목사님의 설교 속에나 있는 하나님이 다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명을 알지 못하고

무덤의 신앙을 가지니 하나님도 그렇고

사람들과도 친근감이 없습니다.

 

 

생명의 교제는 고사하고 사람들 안에서 누림이 없습니다.

사람을 통해 천국을 누리고

사람을 통해 위로를 누리고

사람을 통해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명이 안에 왔습니다.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생명이 안에 왔습니다.

가슴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삶이 열리고

인생이 오픈됩니다.

 

 

아직 마음이,

삶이

인생이 다른 이들과 함께 열리지 않은 사람은

아직 생명의 풍성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직 무덤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덤의 증거가 아니라

무덤의 실체인 생명을 만나야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무덤 앞에서 놀고 있습니다.

무덤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질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생명 없는 생명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우리를 뛰게합니다.

생명은 우리를 춤추게 합니다.

생명은 우리를 평안으로 인도합니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하나님이 준비한 생명이 얼마나 깊고 충만한지

전부를 팔아도 마음이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은 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실체를 만나야합니다.

 

 

아무리 부활의 생명이 있고

부활하신 주님이 있어도

내가 부활을 만나고 보고 믿지 못하면

우리는 무덤 놀이를 평생 하고 살아야합니다.

 

 

무덤 놀이에 교회가 지쳐갑니다.

무덤 놀이에 영혼들이 죽어갑니다.

무덤 앞에서 우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사람은 본질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사람은 생명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지금도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앞에

치를 떨고 방황하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생입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이 안에 오면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목마르지 않는 생수입니다.

 

 

생수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죽음과 십자가

그리고 무덤을 선택하셨습니다.

무덤을 보면 안되고

무덤의 주인이셨고

부활의 주인인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합니다.

 

 

그분을 만날 우리의 삶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아무리 무덤을 향해 뛰어도 찾을 없기에

주님이 친히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오십니다.

 

 

찾아 오시는 주님~!

얼마나 감격인지요.

내가 가지 않아도 우리의 두려움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인사하시는 주님!

 

 

우리의 주님,

생명의 주님입니다.

 

 

사망을 이겼다는 것은 세상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세상의 전부를 이겼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은 우리를 여전히 무덤에 머물게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생명을 알지 못하게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목사를 이용합니다.

목사를 통해 생명을 보지 못하게

생명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부모를 이용합니다.

부모를 통해 생명을 보지 못하게

생명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이용합니다.

생명이 없는 것처럼

생명이 없는 사람처럼 살게합니다.

더욱 세상적이고

세상보다 세상적인 교회가 되게합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을 만날 때만이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오직 생명입니다.

복이 아닙니다.

복은 생명의 능력입니다.

 

 

생명의 능력이 세상을 이기지

작은 개개인의 복이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생명!

우리의 진정한 능력입니다.

아담이 잃은것 오직 하나!

생명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