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벗김을 당한 이유(요19:23-24)
아담의 죄로 온 인간의 감정은 두려움과 수치입니다.
아담은 두려워서 숨었고,
벗었으므로 그 부끄러움, 수치를 가렸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자신의 속옷도 벗기움을 당하십니다.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집니다.
이것은 시편 에서 예언된 이야기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시22:18)
왜 예수님은 옷을 벗기우고 옷을 제비 뽑아 빼앗기는 일을 당할까요?
왜 시편은 그렇게 예언을 하고
왜 그래야만 하나요?
모두 <수치>입니다.
수치스러움,
부끄러움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당한 수치를
구약의 모든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할레입니다.
유월절에 그들이 드리는 할례를 통해 애굽의 수치를 떠나게 하였다고 하나님께서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5:9)
애굽의 수치입니다.
아담으로 인한 사단으로부터의 수치, 부끄러움이 계속해서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시편에도 수 많은 수치를 이야기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구약의 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 수치에 관해서 말합니다.
그 수치의 마지막 결론이 예수님에게서 끝이 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담이 죄를 통해 얻은 수치를
예수님께서 모두 함께 지시고
그 수치를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옷을 벗었던 아담같이
예수님도 옷을 벗었고
벗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던 아담의 부끄러움을
예수님께서 함께 벗음으로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평강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까지도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영광입니다.
영광스러움입니다.
당당함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모든 수치를 물러가게 하시는 길갈의 역사를
우리 삶에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원래 옷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고 수치스러움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수치스럽게합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 수치와 부끄럼움도 예수님은 물러가게 하십니다.
사라지게 하십니다.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흰옷을 입도록 하십니다.
벗어야 새롭게 입기에
벗음으로 가진 수치를 흰옷을 입게 하심으로 가려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심을 통해 이루시는 우리의 영광입니다.
그 수치는 아담이 당하고
인간이 당한 수치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 인간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승화시키시고
공감하시고
끌어 안으셔서 직접 그 수치를 당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머무는 모든 사람에게
그분과 함께 수치도 물러가게 하시는 영광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들어가기전 유월절에 가진,
길갈에서 가진 할례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이루어지는 영광,
수치와 부끄러움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를 만남으로 우리가 가지는 감정은
세상에 대하여 자유함이며
당당함입니다.
부끄럽지 않음입니다.
숨고 싶지 않고
세상으로 빛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벗기심은 바로 우리의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보면 부끄러워합니다.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죄,
자신의 약함,
자신의 없음으로 자신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렵습니다.
자신의 형편없이 벗은 모습이 드러나면 수치입니다.
그러나 그 수치를 덮으시는 주님을 알게됩니다.
간음한 여인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담입니다.
바로 죄 가운데 수치를 당하는 우리 인간입니다.
수 많은 사람 가운데 자신의 죄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여인을 향하여
모든 악한 자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고
숨을 수도,
도망 갈 수도 없는 그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자신도 그 여인과 함께
벗기움을 당하고
옷을 제비 뽑는 자들에게 빼앗기는 자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치를 덮으시고
부끄러움을 감추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은
옷 벗김을 당하시는 사랑입니다.
벗음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수치와 부끄러움도 동참하시고 동행하시고
안으시고 품으시고 덮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때부터 벗은 자들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우리입니다.
호세아서의 부정한 여인이 우리입니다.
수치를 알지 못하는 우리,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우리
그러나 실상은 부끄럽고
실상은 수치가운데 사는 우리와 함께
모든 수치를 물러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몸짓이
자신도 함께 벗으심입니다.
왜 예수님이 옷을 벗으십니까?
왜 제비를 뽑아 옷을 빼앗기십니까?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자신이 다 덮으시고
회복하시는 사랑의 몸짓입니다.
자신의 수치를 면하기 위해
아담은 하와에게 숨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뱀으로 인한 수치
하와로 인한 부끄러움,
아담으로 인한 모든 수치와 부끄럼움으로 인한
얼굴 들지 못함을
오늘 회복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벗은 몸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부끄럽지 않아야합니다.
이제 수치가 없어야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과
부끄러움을 회복하시는 사랑안에 오늘도 당당함으로 서야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옷을 벗기도록 허락하신
유일한 이유입니다.
아담의 벗은 몸으로 느낀 수치와 부끄럼움이
예수님이 옷 벗김을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모든 허물의 덮음입니다.
그것이 얼굴을 들지 못하는
모든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자꾸 전가하려합니다.
우리는 자꾸 문제를 저들,
저 사람때문이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돌을 들려합니다.
공격하려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은
<옷 벗음>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옷벗음이 이어야합니다.
수치를 가려주고
부끄럼움을 내가 대신 덮어주는 자리까지 가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손가락질 하던 손을 내려야합니다.
문제가고 지적하던 나의 도끼눈을 감아야합니다.
돌을 들던 손을 내리고
말 없이
그냥 땅 바닥에 글을 써야합니다.
"나도 너처럼 옷을 벗는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님이 사신 방법과 반대로 사는 우리입니다.
믿음은 방식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옷 벗음을 지적하지 말고
함께 영적인 옷 벗음으로 그들의 수치를 덮어주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God's window 라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창문이라는 곳인데 경치가 꼭 하늘에서 창문을 내다보는 곳처럼 보인다고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그렇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성경만 생각하려 합니다.
글이 길고
읽기가 힘든 분들이,
읽기가 불편한 분들이 있는 줄압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성경을 찾고 싶습니다.
당분간은 그냥 그렇게 가보려합니다.
글이 길어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자기 말을 하는 세상에서
그냥 하나님이 보시는 성경을
말씀을 알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