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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 그리고 두려움

빌라도 그리고 두려움

 

 

 

 

 

 

 

 

 

 

 

빌라도 그리고 두려움 (19:8)

 

 

 

사람이 가지는 두려움은 가지 경우에 발생합니다.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한마디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두려움입니다.

오늘 빌라도가 예수님과 무리들의 사이에서 느낀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8)

 

 

 

우리 인생들에도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따르지 않으면 안될 같은 두려움,

그리고 진리를 외면할 없는 두려움입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의 소리와 외치는 함성에 무서움을 느낍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해야만 같은 무서움입니다.

그러나 더더욱 두려운 것은 예수라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쩔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세상을 따를 수도,

그렇다고 예수를 놓아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인생은 두려움입니다.

가지 사이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세상이 소리를 치고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흘러가는 풍조에 따르지만

그렇게 살수록 마음속에는 두려움만 더합니다.

세상이 편하다고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실체는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지금 자신 앞에 자신 보다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권력보다 권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렵습니다.

두려움의 실체는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봐도 무섭고,

하나님을 봐도 무섭습니다.

중간에서 두려움으로 숨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담이 숨은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죄가 가져온 두려움입니다.

 

 

오늘 군인들이 예수님께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손으로 때리면서 외친 소리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평안을 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을 그렇게 감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다른 모습으로 위장합니다.

태연한 하며

있는 자리에서 별일 없을 것처럼

잘될 것이라는 자기체면을 걸면서

사람들에게 든든하고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 수록

속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임이 무거운 사람일 수록 더하고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일수록

자리가 주는 무게로 두려움을 더합니다.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도

그렇다고 진리를 외면할 수도 없는,

세상의 소리가 커질 수록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수록,

세상에 점점 깊이 적응하고

사회적으로 깊은 관계 속에 살아 갈수록 사람은 두렵습니다.

그것이 평안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군인들의 소리,

평안할지어다는 내가 평안을 원한다로 들어야합니다.

장담을 하고

소리를 치고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들키기 싫어서

불안해 하는 모습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반대의 말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두려움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주신 능력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맡기는 것입니다.

전부라는 의미 속에는 자신의 삶의 바닥까지도 말합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간다라는 마음이 있으면

두려움을 이길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지금 자리를 빼앗길 같은 두려움입니다.

있는 것도 사라질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살아야 하는데 ,

잘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높아지려는 사람일수록,

많이 잡으려는 사람일수록,

야망과

꿈을 가진 사람일수록 두려움의 강도는 강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바닥은 죽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전부를 맡기는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은 버려야 대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버릴 없는 유일한 한가지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하나님의 진리 사이에서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 묻는 빌라도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9)

 

 

예수님이 잡은 것은 세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고

빌라도는 포기할 없는 자신의 세상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의 실체는 길을 정하지 않아서입니다.

,

하나님께 가는 길을 정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목표로 살면 하나님의 평안으로 사는 것입니다.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의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움과의 싸움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을 하십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의 싸움에서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평안을 가져오고

믿음이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바다를 걷다 물에 빠진 것은 바람을 이유입니다.

세상을 보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14:30]

 

 

세상은 자꾸 바람 소리를 냅니다.

자신의 소리를 냅니다.

자신의 존재를 통해 무서움,

두려움을 주려합니다.

바람이 우리를 빠뜨리지 못합니다.

 

우리를 바다에 빠뜨리고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것은

바람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약한 믿음입니다.

의심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14:31]

 

 

세상이 하는 일은 자꾸 세상을 주목하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을 주목하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것은 오직 무서움이고 두려움입니다.

 

 

세상의 목적은 자꾸 하나님의 길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으로 바다에 빠지고 갈등하고 고민하고 아파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자신을 보게합니다. 

자신의 소리를 우리에게 외칩니다.

자신을 보라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립니다.

 

 

 

두려움의 실체는 자신의 자리,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오는 감정입니다.

 

 

버림받고,

외면 당하고

세상을 따라가지 못할 같은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은 자리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리,

능력자로서의 ,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리를 버리십니다.

 

 

그것이 두려움이 없는 이유입니다.

버리면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평강이 옵니다.

 

 

자신이 평안하지 못해서

죽어가는 자를 향하여 왕이여 평안하라고

소리에 숨어버리는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버릴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이어도

하나님의 길이면 믿음으로 걸어가는 믿음

그것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우리는 두려움과의 싸움입니다.

인생은 두려움과의 싸움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찾아온 두려움,

두려움과의 싸움이 인생입니다.

 

 

두려운 인생을 향하여

예수님이 보이신 답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믿음,

하나님이 죽음까지도 이기게 하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외침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보도록 미혹합니다.

이미 세상의 마지막 무기인 사망을 이기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는 이깁니다.

 

 

이김이 보장된 싸움에 세상은 소리로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움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음성을 주십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평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빌라도는 오늘 세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 가운데 그의 인생이,

그의 이름이 끝이 납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무서워하지 맙시다.

죽으면 죽으리라

나에게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밑져야 천국이다 이런 맘으로 살면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으로 넉넉한 삶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있었던 이유는

전부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 분만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이기는 길입니다.

 

 

빌라도도

아담도 자신을 잡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오고

실패가 오고

관계가 깨어지고

결국 자리를 빼앗기는것입니다.

 

 

자신의 포기해야합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해야합니다.

천국은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에 있습니다.

 

 

자리를 포기하면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이익을 포기하면 평안이 옵니다.

편안함을 포기하면 기쁨이 옵니다.

 

 

아담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자리를 놓치기 싫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유대지도자들은 자신의 힘을 놓치기 싫었습니다.

 

 

두려움은 잡으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평안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하나님만 잡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빌라도,

두려움,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곳에서 시작되는

나의 다른 얼굴입니다.

 

 

 

나의 얼굴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얼굴은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얼굴이 나를 위해 사용될 아픔이 찾아옵니다.

 

 

!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을 하와를

하와는 아담을 위할 그곳에 천국입니다.

 

 

,

나를 위하는 곳에 평안이 없습니다.

,

자신을 사랑함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곳에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

나를 위해 살지 맙시다.

그것이 어그러진 세상에

하나님이 놓은 우리를 사랑하는 법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